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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5 일째

서해 바닷가 사구에서 ( 퍼온글 )

서해 바닷가에 한 친구가 산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하루 나는 10년 만에 그를 찾아 그 바닷가 친구의 작업실로 갔다. 친구와 사구로 갔다. 바닷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언덕을 이룬 사구는 아마도 수만년의 나이를 먹었을지 모른다. 사구는 모래와 겨울 풀과 모래 땅에서만 자라는 가시나무 줄기들로 덮여 있다. 이른 달이 뜨는 오후의 해변 저편으로 화력 발전소의 굴뚝 끝에는 방금 토해낸 연기가 수평으로 꺾이고 있었다. 풀들은 바람처럼 이리저리 꺾이고 혹은 중동으로 서 있거나 혹은 아예 누워 있었다. 우리는 `사구보존 결사반대'라고 붉게 씌어진 현수막들을 지나갔다. `사구개발 결사저지'라 씌인 다른 현수막도 있었다. 각각의 여덟 글자들은 찬 바람을 맞으며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트럭 자국이 파인 꽁꽁 언 길을 말없이 내쳐 갔다. 친구는 사구에 흩어진 스티로폼을 주워 꿈 속에서처럼 어디론가 팔매질을 했고 나는 삼각대를 세우고 사구를 찍었다. 바람과 모래 언덕만을 찍은 내 사진은 아름답기만 할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오래된 바닷가에서 두 종류의 구멍 얘기를 했다. 한 구멍에서 자원을 뽑아 올려 얼마간 쓰고 다시 쓰레기로 다른 구멍을 메우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구멍이 하나였다. 사람들은 지난 50년간 그 전의 수천년보다 더 많은 구멍을 지구에 뚫었는데 이제 서해안 모래 언덕에도 그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고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나는 서울에서 재벌이 지원하던 미술관 두개가 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이를테면 이것은 작가들의 막히는 숨구멍에 대한 얘기였다. 미국에서 잠시 공부할 때 재벌집 자제가 다니던 미국 미술학교의 모든 컴퓨터를 그 집에서 갈아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있음직한 일이다. 우리 재벌들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자기 이름을 붙인 전시실을 둘 정도니까 그런 비용은 우습지도 않을 것이다. 그 재벌들은 국내에서도 이른바 문화사업을 한다. 그런 문화사업들은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구조조정할 수 있고 시혜 차원의 지원은 하시라도 거둬들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난 십수년간 미술관 설립은 재벌 안주인들의 고품위 취미가 되었고 소유주가 관장이 되는 기이한 구조는 관습처럼 정착되었다. 이런 미술관 설립 붐은 마치 서양 미술사의 17세기로 돌아간 느낌을 갖게 한다. 당시의 네덜란드 신흥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풍경화 속에 그려 넣음으로써 스스로 소유물을 축하하고 부를 과시했다. 3백년도 더 전의 일이 오늘 우리 땅에 부활해 있고 부자의 소유물을 확인해주던 화가들은 여전히 살아 미술관 주위를 맴돈다. 그날 우리가 사구에서 본 것은 한편에선 숨쉴 구멍을 막는 사람들이 다른편의 지구에 파고 있는 돈의 구멍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 마을을 걸었다. 파밭 언덕배기에 철골을 올리다 만 교회가 있었다. 지붕 서까래와 첨탑 구조가 붉게 녹슨 채 짐승의 뼈처럼 서 있다. 낮은 구릉을 지나니 유리창 깨진 상가 건물이 간판이 내려진 채 서 있었다. 나는 친구의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었다. 마흔을 훌쩍 넘어버린 친구는 왼쪽 배에 5㎝ 길이의 칼맞은 흉터를 가지고 있다. `작품 100점 내놔!'라고 조폭이 말했다. 시골 조폭에게 뚫린 창자를 끊어낸 친구는 6개월을 입원했다. 그런 친구는 지지난 해 배추값 파동이 났을 때 손수 장터에 떨어진 푸성귀를 주워모아 가족을 먹였다. 친구는 `나쁜 짓 아닌데도 가슴이 자꾸 콩닥거렸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글만 쓰는 친구의 그 해 총수입은 2백만원 남짓이었다 한다. 사구에서 돌아나오던 길에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은 양지에 눈이 녹으면 봄이 온 줄 알지. 그러나 정작 눈의 고향은 음지인 것을….” 김우룡/사진작가 (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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