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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日目

삶, 영원한 이별

-오빠, 안석이 엄니가 돌아가셨어요 오늘...

부의금은 얼마나 어떻게 하실거요??

장례식장은 송정리라고 하네요.

못 오시죠?

-그랬어?

그래,그건 내가 알아볼께.

 

치매로 몇 년간 고생하신단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있었다.

시골의 그 넓은 집은 텅 비어놓고 딸 집에서 보살핌 받고 계시단 소문

왜 가까운 아들집을 놔 두고 먼 경상도 딸 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형제간의 불화겠지.

그런집이 너무도 많으니까...

 

가족이 많아 늘 떠들썩하던 그 집.

2년간 비어논 집이 흉가처럼 을씨년 스럽게 보인건 왜 일까?

왜 예전의 것들은 모두 그렇게 비감으로 반추되는걸까?

 

안석인 고향의 친구.

함께 3년간 나주까지 매일  통학을 했었던 동갑.

학교를 졸업하곤 떠나온 나와 그곳에 정착한 친구

자주 볼수 없었다.

 

학창시절엔,

안석이가 부러웠다.

우리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부자였고,잘 사시는 큰 아버지가 번쩍 거리는 3000 리표 새자전거를

사주시곤 했었다.

큰 아버진 변변한 아들이 없어 늘 안석이를 든든한 조카로 봤던거 같았다.

무거운 짐싣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 나와 가볍과 날랜 3000리 자전거 타고 다닌 안석이

비교가 되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해서 안석인 시골에서 당시 드문 대학생까지 되었지만...

출세했단 소문은 듣질 못했었다.

한때는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그.

시골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아나운서 되는게 어디 쉬운일인가? 

서울의 일류 대학을 나와도 그건 별따기 처럼 어려운 일인데......

하긴,

나도 한때 이 광재나 송 환규 처럼 유명한 아나운서가 되고는 싶었지.

60년대에 아나운서 처럼 부러운 직업이 또 있었을까...

 

광주에 사는 진남에게 부탁했다.

-나 조문 가야 하는데 사정상 못갈거 같아

자네가 대신 부의금 좀 넣어줘.

글고, 애기도 잘 해 주고...

갈거지?

-그럼 나야 지척인데 가야지.

나중에 애기해 줄께.

 

사춘기 시절엔,

가깝게 지낸 사이들이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보니 그런 정도 조금은 퇴색된걸까?

달려가지 못한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진리인거 같다.

 

논밭이 부자의 척도로 봤던 그 시절.

천석꾼으로 떵떵 거림서 뭣하나 부족함이 살았던 안석.

-늘 쌀밥이 주식인  그 집이 부러웠고.....

-기와집으로 넓고 쾌적한 그 집이 부러웠고...

-공부할 의지만 있다면  대학까지,아니 외국유학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아버지의

교육열과  그 집의 재력이 부러웠다.

가난때문에, 대학은 가고 싶어도 갈수 없었던 내 눈엔 얼마나 부럽던지....

늘 혈색좋고 명랑한 안석인 부러움의 대상였다.

적어도 그 당시엔......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그 어떤 영화를 누리고 살아도 갈땐 빈손인걸..

왜들 그렇게 돈에 집착들을 하는지..

가실땐 소중한 눈 마져 남을 위해 주고 떠나신 고 김 수환 추기경님.

달랑,

묵주한개만 손에 모으고 단아하게 떠나신 그 분.

세상은,

그렇게 편하게 살다 가야 하는것.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만년에 고향의 품에서 잠들지 못하시고 타향에서 가셨단 것에

조금은 안쓰럽다.

내 자식들은 모두 효자가 되어라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라 하곤 신신 당부하고

가르쳤지만 그게 부모 맘 처럼 되던가?

자식들의 불화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지하에선들  과연 편할까.

안석이 어머님의 명복을 빈다.

또 다시 낯익은 얼굴을  또 하나 지워야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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