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에 4 명의 이모. 어려서 부터 내겐 이모란 존재는 각별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다름없는... 아버지 친척들은, 좀 소원하게 지냈어도 어머니 친척들은 모두가 다정하게 지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한 동네 살아서 그랬을까?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 당시엔 입에 풀칠한단 것이 지상명제였고 이것 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은 없었다.
4 명의 이모가 모두 가난했지만... 한 10 여년을 처 자식 팽개치고 떠돌이 생활을 했던 두째 이모부.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방랑벽이 심했었다. 10여 만에 돌아온 이 모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모르다가 어 느날 나타났던 두째 이모부. 그 10 여년 동안, 가족의 생계를 대신했던 이모. 행상으로 6 남매를 억척스럽게도 길르셨다. 그 고생이야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어린 6 남매를 혼자의 몸으로 길러야 했으니... 두째 이모가 가난한 탓에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서 견딜수 있었을 거다. 우리집 양식도 바닥이 보였지만.. 어머님은 늘 그 이모에게 뭔가 도와 드렸다. 쌀이든 고구마든... 그게 피를 나눈 형제간의 정인거지. 두째 이모부가 10 여년만에 돌아왔을때... 그 간의 고생이 생각나 통곡을 했던 이모.
두째 이모부는, 농한기땐 시골에 있다가 봄이면 타향으로 돈벌러 가셨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면 돌아오고...
객지에서 생활해서 그랫을까?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노래 잘 부르던 두째 이모부. 어떤 날은, 이모부 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면 늘 그 좌석을 주름잡고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던 것은 두째 이모부. < 소리꾼 > 였다. 아마도 유명 선생님의 사사를 받았더라면 명창도 할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 쑥대머리 >도 그때 배우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 보담 2 살인가 많았지만... 두째 이모부는 2 살이 아니라 10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아마도 객지에서 떠 돌이 생활하심서 고생을 많이 하신 탓이 아닐까? 주량도 많고, 주정도 심했었다. 술을 마시면 꼭 누군가와 싸움을 했었다.
호탕하고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시던 그 이모부. 겨우 60이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치매가 왔다. 그 분 특유의 주벽과 난폭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모는 물론, 어떤 친척 조차도 접근을 못하게 하면서 혼자 사셨던 이모부.
그리고 ... 쓸쓸히 돌아가셨다. -잘 죽었어야.. 그렇게 살아서 뭐 한다냐... 이모의 소감였다. 젊어선 고생을 시켰고 늙어선 치매로 고통을 준 이모부. 남편이기 전에 , 악연으로 연결된 부부란 것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모의 그 고생했던 이력을.... 행상 보따리 이고 다니셨던 모습이 선하다.
어쩌다 읍내 나가면 시장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좌판을 펼쳐놓고서 행상을 했던 이모. 그 고생으로 해서 어머니 보담도 10 년을 먼저 가셨지. 너무도 인정많고 너무도 좋은 이모였는데....
5명 중에, 세째와 네째 이모만 생존해 계신다. 간간히 치매의 징조를 보인단 네째 이모님. 하긴, 낼 모래가 8 순이라서 어떻게 알겠는가?
외할머니댁의 그 감나무. 감이 하두 커서 누구나 감탄을 자아낸 감 나무. 여름밤에, 그 감나무 밑에 이모들이 모여 자매간의 돈독한 우의를 과시했고, 어머니 무릎베고 어머니 왕골부채의 배려속에서 슬며시 잠이 들었던 어린날의 추억.
지금도 그 감나무는 그 자리 그 대로 인데... 왜 그 낯익은 얼굴들은 보이지 않을까? 엄니의 냄새속에 무릎베고 꿈나라 갔던 여름 밤의 고운 추억. 되돌아 갈수 없음이 못내 아픈 기억이다. -왜 돌아오지 못하는 추억은 이렇게 아픔 뿐인가?
한 동네에 4 명의 이모.
어려서 부터 내겐 이모란 존재는 각별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다름없는...
아버지 친척들은, 좀 소원하게 지냈어도
어머니 친척들은 모두가 다정하게 지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한 동네 살아서 그랬을까?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라,
당시엔 입에 풀칠한단 것이 지상명제였고 이것 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은 없었다.
4 명의 이모가 모두 가난했지만...
한 10 여년을 처 자식 팽개치고 떠돌이 생활을 했던
두째 이모부.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방랑벽이 심했었다.
10여 만에 돌아온 이 모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모르다가 어 느날
나타났던 두째 이모부.
그 10 여년 동안,
가족의 생계를 대신했던 이모.
행상으로 6 남매를 억척스럽게도 길르셨다.
그 고생이야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어린 6 남매를 혼자의 몸으로 길러야 했으니...
두째 이모가 가난한 탓에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서 견딜수 있었을 거다.
우리집 양식도 바닥이 보였지만..
어머님은 늘 그 이모에게 뭔가 도와 드렸다.
쌀이든 고구마든...
그게 피를 나눈 형제간의 정인거지.
두째 이모부가 10 여년만에 돌아왔을때...
그 간의 고생이 생각나 통곡을 했던 이모.
두째 이모부는,
농한기땐 시골에 있다가 봄이면 타향으로 돈벌러 가셨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면 돌아오고...
객지에서 생활해서 그랫을까?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노래 잘 부르던 두째 이모부.
어떤 날은,
이모부 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면 늘 그 좌석을 주름잡고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던 것은 두째 이모부.
< 소리꾼 > 였다.
아마도 유명 선생님의 사사를 받았더라면 명창도 할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 쑥대머리 >도 그때 배우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 보담 2 살인가 많았지만...
두째 이모부는 2 살이 아니라 10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아마도 객지에서 떠 돌이 생활하심서 고생을 많이 하신
탓이 아닐까?
주량도 많고, 주정도 심했었다.
술을 마시면 꼭 누군가와 싸움을 했었다.
호탕하고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시던 그 이모부.
겨우 60이 조금 지났을 무렵부터 치매가 왔다.
그 분 특유의 주벽과 난폭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모는 물론, 어떤 친척 조차도 접근을 못하게 하면서
혼자 사셨던 이모부.
그리고 ...
쓸쓸히 돌아가셨다.
-잘 죽었어야..
그렇게 살아서 뭐 한다냐...
이모의 소감였다.
젊어선 고생을 시켰고 늙어선 치매로 고통을 준 이모부.
남편이기 전에 ,
악연으로 연결된 부부란 것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모의 그 고생했던 이력을....
행상 보따리 이고 다니셨던 모습이 선하다.
어쩌다 읍내 나가면 시장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좌판을
펼쳐놓고서 행상을 했던 이모.
그 고생으로 해서 어머니 보담도 10 년을 먼저 가셨지.
너무도 인정많고 너무도 좋은 이모였는데....
5명 중에,
세째와 네째 이모만 생존해 계신다.
간간히 치매의 징조를 보인단 네째 이모님.
하긴,
낼 모래가 8 순이라서 어떻게 알겠는가?
외할머니댁의 그 감나무.
감이 하두 커서 누구나 감탄을 자아낸 감 나무.
여름밤에,
그 감나무 밑에 이모들이 모여 자매간의 돈독한 우의를
과시했고, 어머니 무릎베고 어머니 왕골부채의 배려속에서
슬며시 잠이 들었던 어린날의 추억.
지금도 그 감나무는 그 자리 그 대로 인데...
왜 그 낯익은 얼굴들은 보이지 않을까?
엄니의 냄새속에 무릎베고 꿈나라 갔던 여름 밤의
고운 추억.
되돌아 갈수 없음이 못내 아픈 기억이다.
-왜 돌아오지 못하는 추억은 이렇게 아픔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