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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日目

실미도



  

<실미도>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단 애기다.
이미 잊혀진 애기들이 영화로 해서 조명 받는 실화.
왜,
30 년전의 애기가 새삼 조명받는가?

-71 년 8월 23 일,
군복을 입은 신원을 알수 없는 24 명의 무장 요원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하다가 뒤 늦게 연락받고
출동한 군인과 총격전끝에 서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마친다.
군당국의 공비침투라고 발표로 그런줄 알았던 묻혀버린 역사.

-이들이 누군가?
이들은, 김일성 주석궁을 침투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던 실미도 특수부대원들.

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정식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
68년 4 월에 창설되었다해서 684 부대라고도 한단다.


68 년 1월에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
분노를 느낀 박 정희의 지시로 그들와 같은 31 명으로
실미도 부대를 창설.
김형욱 중정부장과 이 철희 대북공작책 제 1 국장에 의해
만들어 졌다.

71 년 8월 23 일 훈련병의 난동으로 기간요원은 모두 사살
당하고 겨우 6 명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실미도 실무최고책임자인 소대장 김 방일씨.
-끔찍했습니다.
전쟁으로 페허가 된다해도 이 보담은 더 처참할수
없을것입니다.
훈련병들에게 피살된 기간요원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머리가 으께어져 뇌수가 천정과 벽에 흩어져 있는 현장은
차라리 내가 먼저 죽었으면 싶었습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은 똑 같이 자면서 생활했고,
3 개월이 지나서 부터 보급이 끊기고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났다
68 년 8월에 북한침투명령이 났다가 전격 취소.
단 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남북한이 대화노선으로 바뀌고 실미도부대의 의의가
사라지게 된다.

24 명의 훈련병은 기간원을 사살하고 겨우 6 명만 살아남는다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로 진입중에 군인들과 조우중 모두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만다.
그리고..
생존자 4 명도 모두 사형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
< 인터넷에서 발췌한 자료로 재 구성했음 >


그때,
요란스럽게 방송되었던 실미도 사건.
무장공비의 서울 침투인줄 알았었다.

얼마전에,
실미도 관련이 방송으로 조명된것을 봤었다.
생존자의 증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죠.
지금은 온몸이 망가져 제대로 활동하기도 힘든다.
지금에사 국가에서 관심을 갖어준건 다행이긴 하지만..
우리의 잃어버린 세월은 어떻게 보상 받나요?
몇 푼의 보상이 중요한게 아니라........
왜곡되어 알려진 북파공작원의 실상에 대한 명예회복이
더 시급한거 같아요.

국가의 부름으로, 국가가 필요해서 만든 부대.
계급도 군번도 없이 오직 북한에 침투하여 애국심을
발휘하여 진정한 애국자가 되려던 사람들.
효용가치가 없어지자 귀찮은 헌 신짝 처럼
아무렇게나 팽개친 행위들.

평화를 사랑하는 남한에서 북파공작원을 양성했단 사실이
탄로난다면..??
과연 실미도의 북파공작원 31 명을 살려둘수 있을까?
귀신도 모르게 처단시킬지도 모를거다.
그런 두려움,
훈련병들의 불안감이 그런건 아니었는지.....

살기위해서 저항했던 이들.
왜 이들을 무인도에 3 년 4 개월동안 그렇게 방치하고
훈련만 시켰던가.
왜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어떤 대책도, 책임도 없이
그렇게 방임했던가.

냉전 시대의 희생양 북파공작원들.
이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몬게 국가의 책임이 아닌가?
국가가 저지른 추악한 단면.
부끄러운 죄.
이젠, 모두 그 진실을 밝히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명예
는 물론 보상도 뒤 따라야 하리라 본다.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건 국가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기에....
북파공작원으로 차출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분들의 명복을 빈다.

이 정도의 진실을 캘수 있었단 것도 영화 살미도 덕분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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