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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방송(KBS)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 행각을 고발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두 신문은 그러한 문제 제기를 인정치 않았다. 여기서 보듯이 우리의 뼈아픈 친일 경험은 영원히 극복되지 않는 문제로 남을 것이다.
두 신문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 의식을 깨우치고 대중을 계몽한 민족지로서의 공헌이 컸다. 그 공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강요되었든 강요되지 않았든 두 신문이 일제 말기에 친일 행적을 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그 사실 여부조차 논란거리가 될까? 왜 두 신문은 그 일시적인 과오를 공개적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다짐을 독자에게 내놓지 못하는 걸까? 그러면 독자들은 그들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고 믿음을 주지 않을까?
실제로 최근 들어 친일 행각을 옹호하고 친일파 단죄를 반대하는 논리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논리, 친일파 여부를 판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 논리, 친일파 운운 자체에 정치적인 저의가 있다는 정치 논리 등이 그것이다.
이런 논리들은 현실을 호도하거나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려는 궁색한 변명들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 윤리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친일 단죄라는 당위가 이런 저런 이유로 회피되는 까닭은 그것을 실행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 지적하듯이 친일파의 후손이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고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비루한 처지에 빠졌기 때문이다. 광복 후의 역사가 첫 단추를 잘못 끼었기에 친일 문제의 해결은 이미 그때 물건너갔다.
그러니 잊을 만하면 나오는 친일 단죄의 움직임은 힘도 못 쓰는 ‘정치적 저의’로 치부되고 말 뿐이다.
친일 문제의 진실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우리에게는 친일 행각을 진정으로 반성할 정신적 바탕이 없다. 우리의 역사는 힘센 자에게 굴복하고 약한 자를 못살게 군 역사다.
이 말을 하기는 가슴 아프지만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는 사대주의의 역사다. 밖으로의 비굴함을 안으로의 횡포로 보상하는 예속적 전제 정치의 역사다.
천 년 동안 중화를 섬겼던 사대의 역사가 친일로 이어진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역사는 지금도 이어져서 이른바 친미 사대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한국의 ‘주류’는 이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현실론과 국익의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한다.
이완용 또한 망해가는 조선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을 할 것인가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였다. 그 결과가 ‘일한’ 합방에 앞장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민했다는 사실이 그의 선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론자’들의 가장 큰 모순은 그들이 내세우는 국익 또는 민족 이익이 실은 자기의 개인 이익이라는 사실이다. 현실론자 중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국익을 추구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자기 희생은 잘못된 현실을 거부하는 이상론자들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친일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까닭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친일적’이고 우리 대다수가 잠재적인 친일파들이라는 사실이다. 심심하면 터지는 목청 높은 반일 구호들은 실상 그런 우리의 공허한 구멍을 메워보려는 자기 모순적인 발버둥이다.
정부는 박정희 통치 이래 한번도 ‘반일’적인 정책을 펼친 적이 없고 이 사회의 주류 엘리트들은 한번도 진정으로 반일적인 사업을 이룬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우리의 목표가 반일일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 떳떳하게 일본에게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 속에 숨은 친일과 사대의 정신을 극복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길이다.
/김영명 한림대 사회과학대 학장 ( 퍼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