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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청춘멜로물의 간판급 스타.
신성일, 엄앵란 부부..
그들이 결혼 40 주년이 된 싯점에 출연하여 살아온 애기를
들려 줬다.
일간지 작은 코너에,
< 신인 배우 신성일 >에 대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눈이크고, 짧은 스포츠 헤어스타일의 사진.
신인이지만, 유망주란 토도 달았던거 같다.
그가 떠오르기전엔,
최 무룡, 김 진규, 신 영균의 토롯이카가 간판급 스타로 영화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중후하고, 애수어린 눈 빛의 최무룡이 멜로물은 주름잡고 있었고, 김진규,신영균이 등이 한치의 양보없이 누비고 있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
그 시대의 영화,
그건 대단한 것이었다.
마땅한 놀이 문화가 없던 시절이라 극장에 간단 것은 서민들이
즐길수 있는 가장 값진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연인과 데이트 코스론 영화관 찾는 것은 뺄수 없는 코스.
극장이란 공간에서 사랑을 속삭였고, 정을 느낄수 있는곳이었다.
반항아 적인 스타일에 짧은 스포츠 머리형.
거친 말투와 함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의 연기.
그게 신선하게 먹혀 들었던 것..
그 시대에 스포츠형의 머리를 유행시켰던건 신성일 때문였을거다.
너도 나도 스포츠 머리가 유행였으니...
간판급 스타들이 이미 평정하고 있는 자리에 뛰어든 그..
파격적인 연기와 팔팔 넘치는 윗트와 불량기가 그의 매력을
물씬 풍기게 했던건 아닐까?
장안 여성의 심금을 울렸고,청춘물의 심볼스타로 급부상했다.
모든 청춘물에,
단골배우로 나온 두 청춘 스타..
엄앵란, 신성일.
어느 극장 간판을 봐도 두 사람의 그림이 걸려있을 정도였다.
두 콤비는 명콤비로 척척 잘도 맞았다.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고, 그들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모르게
치솟기만 했다.
급기야 둘은 결혼.
연상의 여자를 아내로 맞은 신 성일.
그가 엄앵란을 외면 못한건 아마도 의리때문이 아닐까..
연상의 여자를 아내로 맞는것을 극구 반대했다는 그의 가정.
그걸 그는 이겨내고, 자신을 있게 만든 엄앵란을 차마 외면할수
없었지..
엄앵란이 있어 그는 스타로 성장할수 있었고,신성일이 명 배우로 인정받을수 있었던건 아닐까.
-내 딸 앵란은 내가 잘 안다.
하고 자신의 딸을 두둔했던 홀 어머니..
장안의 스캔들에 그렇게 믿음섞인 발언을 했던 어머니..
바보처럼 그렇게 처신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애기.
< 사색의 구름다리 >란 시집도 낸 엄 앵란.
연기외에,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시집.
글쎄, 그 시집을 보진 못했지만...??
자신의 줏가를 울릴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가정주부로 안주한 엄 앵란.
그 뒤론 신성일과의 콤비 출연은 무산되었지만, 신성일을 따라
다니는 핑크빛 소문들을 가슴아프게 들어야 했을거다.
미남배우를 델고 사는 것에 댓가라고 ......
그게 가정 주부로 내려앉은 여자가 느끼는 아픔이라고...
몇 번의 사업 실패와 좌절..
그걸 극복해준건 엄앵란의 힘이었다.
이혼을 밥 먹듯이 했던 배우들..
이들은, 이혼 만은 해선 않된단 생각으로 살아왔다.
여전히 매력이 물씬 풍기는 신 성일..
그리고, 그 뒤에서 남편의 뒷 바라지를 잘 해온 엄앵란.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미웁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하던 엄앵란.
이게 사랑의 감정이 아니고 뭔가?
몇 번의 시련을 이긴 것도 이런 < 사랑의 힘 >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황혼,
두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느낄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