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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 오히려 아름답고, 뿌리 깊어 흔들리지 않는 이 동구나무는 도대체 누가 언제 심었을까.
아담하지 않고 크기만 하거나, 젊지 않고 늙으면 필경 추하거나 쇠락하기 마련인데 어째서 수백년을 한 곳에서 제자리걸음만 했어도 푸르고 무성하기를 놓친 적이 없었을까. 마을 들머리에 의연한 자태로 서 있는 느티나무를 쳐다보면서 가졌던 생각들이었다. 수백년 동안 동구 앞을 지키며 소슬하게 서 있었기에, 그 고장에 살았거나 스쳐갔던 숱한 사람들보다 많은 애환의 향기가 켜켜이 서려 있다.
햇살에 드러나는 정교한 색채와 속삭임, 나이 들면서 터득한 오묘한 몸짓, 달빛을 한껏 머금었을 때의 숙연함 그리고 아침의 초연함. 바람만 어루만지고 떠난 그 변화무쌍한 지혜의 내막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석가모니가 거두신 이승살이 흔적인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대로, 비바람과 진눈깨비가 몰아치면 또한 그대로 온전하게 감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푸름으로 일관해온 그 세월의 비애와 우여곡절을 누가 감히 흉내낼 수 있을까.
마을 들머리에 들어섰을 때, 나이 든 동구나무가 바라보이면, 누가 떠먹여주지 않고 귓속말로 속삭여주지 않아도 문득 마음 속으로부터 고즈넉한 평화를 느끼게 된다. 마을을 이별하려는 사람이 이 나무 아래 이르면, 반드시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할 것 같은 미련의 최면에 걸린다. 그것은 이 나무가 서 있는 곳이 만나거나 떠나가는 길목의 원점이라는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늙은 나무 등걸에는 몰래 떠난 사람이나, 몰래 찾아왔었던 사람의 키 높이에 걸맞은 낙서가 숱하다. 그 익명의 문구들은 대체로 약속이거나, 압축된 회한의 글귀들로 채워져 있다. 칼끝으로 피부를 파고든 음각이기 때문에 그 낙서들 또한 수십년을 헤아려 지워질 수 없다.
이웃 마을 아이가 띄우다 놓쳐버린 가오리연 한 두 개가 높다랗게 걸려 있고, 밑둥에는 지난 대보름 때 마을 사람들이 쳐 놓은 금줄이 바람에 해어져 나부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어른들은 목욕재계하고 제수를 차린 다음, 나무를 향해 제사를 올렸다. 나무의 지혜와 덕목을 관장하는 귀신이 등걸 뒤에 몸을 숨기고 제사상이 푸짐한가 아닌가를 지켜본다고 믿기도 하였다.
소지를 올리면 하늘 끝까지 솟은 나뭇가지 사이로 눈발처럼 하느작하느작 교태를 부리며 오르다가 어느 한 순간 홀연히 사그라졌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제사상으로 우르르 몰려들고, 어른들은 삼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어른들 먼저 음복하고 시루에서 손바닥만한 시루떡을 뚝뚝 떼어내 악다구니를 부리는 아이들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느티나무가 서 있는 그 곳은 정화된 혼령이 장악하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사악한 것이 발붙이지 못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의 하소연과 넋두리와 기도를 너그럽게 받아주고, 우리들 척박한 삶의 터전에 수시로 끼어드는 무력감과 공포심을 치유하고 세척해 준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또 다시 수백년을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미련한 인간들에게 지혜를 나누어주며 마을을 지켜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을엔 슬하에 피붙이를 두지 못했던 과수댁 한 사람이 살았다. 그녀는 땅거미가 내려 어둠이 깔리고, 어스름 달빛이 겨우 동구 밖 길을 비추던 날 밤,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난데없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눈 여겨 살펴보았더니 겨우 칠팔세가 되었을까 말까.
단발머리가 하염없이 자라나 머리에 새집을 지은 계집아이가 때묻은 보퉁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멀고 먼 고장에서 찢어지는 궁핍을 겪으며 살다가 집에서 쫓겨나 구걸로 연명하는 신세였다. 과수댁은 그 아이를 일으켜 집으로 데려갔다.
더운물로 때를 벗겨내고 옷을 갈아 입힌 다음 살펴보았더니, 흐릿하던 이목구비는 제자리에 온전하게 박혀 있었다. 떠돌이 신세가 된 사연을 물어 보았으나 다른 대답은 제법 소명한 체 하는데, 제가 쫓겨난 고향 이름만은 시종일관 모른다고 버티었다. 십 수년 동안 자기를 부엌데기로 삼아 구박하고 홀대하였던 과수댁이 숨지자 그녀는 혈손처럼 손색없는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가하면 과수댁의 일가붙이를 수소문으로 찾아내 과수댁이 남기고 떠난 집과 가재도구들을 처분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마을 변두리에서 곁방살이를 시작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던 한글을 면박과 질시를 감수하며 어깨 너머로 배워, 눈뜨고 못 보는 사람들의 편지대필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어릴 적 떠돌이 생활을 마감시켜 주었던 동구 앞 느티나무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느티나무가 서 있지 않았더라면, 과수댁이 그녀를 발견할 수 있는 운명적인 만남도 없었을 것이란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동구나무에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그녀는 남 먼저 떡 시루를 이고 와서 제수에 보탰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고 병골인 호호야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그 마을 이장이 되었다. 그녀의 신체 중에서 제일 크게 자란 것은 손이었고, 제일 작게 자란 것은 키였다.
/김주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