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日目
코스모스 피어있던 길
나주 고모집에서 산포면 사무소까지 출근했던 시절이 있었다.그때도 ,나주에서 산포면까진 말끔히 포장된 도로라서 자전거로 통근하기가 편했지.허지만, 나주에서 광주로 이어진 간선도로라, 차는 뻔질나게 다녀위험은 항상 안고 있었다.한 10 여분 거리였지.형님이 애지중지하던 번쩍 번쩍 한 자전거.작고 ,날렵하고 멋있게 생긴 자전거.그걸 타고 달리면, 쉬원한 바람이 불어 그렇게 상쾌할수 없었다.말이 고모집이지,어디 그 곳이 우리집처럼 편할수가 있겠는가?나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려고 당신은 퍽도 신경을 써주곤했지만, 불편함은 어쩔수 없었다.그런 알뜰하고, 자상한 고모도 이 세상 떠난지 벌써 2 년이 된다.자전거로 출근하지 않아도 버스가 다녀서 좋긴 한데 출근해선,자전거가 필수품(?) 였다.우리의 일이란 것이, 사무를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각 가정 방문하여 계몽하는 일이 주업무라서....그래서 어쩔수 없이 위험부담을 안고 자전거 통근한 거다.그때 산포면엔,나와 같은 그런 계몽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아가씨 두명.가족 계획 요원으로 각 면사무소 마다 파견 나와서 계몽할동하고 있었다.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그런 계몽할동을 하였으니..-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이런 포스터를 어느 곳이나 볼수 있었지.두명의 잠업 지도원, 가족 계획 요원 두명.지금은,너무도 애를 낳지 않아 노동력의 수급에 차질이 우려된다는엊그제의 뉴스를 보니 격세지감을 느꼈다.너무 낳지 않기 위한 계몽할동을 했던 당시와 이젠 더 낳으란 걸 계몽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렇게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광주에서 다녔던 권 준 잠업 지도원과 두 명의 가족계획 요원.우린 함께 그렇게 출장을 가곤 했다.어차피 발로 뛰어야 하는 것이 엇 비슷한 상황이고 뭣 보담도두 사람은 자전거가 없어 함께 태우고 다녔던 것이 주요 원인.넷이서 출장을 함께 가니 덜 심심하고 재미도 있었다.나주군 산포면 사무소.그 당시는, 나주군에서도 시범적인 잠업으로 명성을 떨친 곳이었다.우린 그렇게 넷이서 짝을 지어 매일 매일 출장을 나갔고일을 마치면 함께 오곤 했었지.그렇게 어울리다 보니,정이 든건 어쩔수 없었던 거 아닐가?넷이서 점심도 같이 먹고,어떤땐 원두막에서 참외랑 수박도 함께 사 먹곤 했었다.이성간에 함께 자주 만나면 정이 든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동료애라 해도 좋고, 알뜰한 정이라 해도 좋은..........산포면은,산이 없었던거 같다,눈을 사방으로 둘러도 논, 논 뿐...끝 없이 펼쳐진 들과 그 끄트머리에 있는 동네들...산포면 사무소에서 큰 길로 나오는 길한 1 km 정도는 되리라.이런 가을이면 길 양편으로 하늘 거리던 코스모스 행렬.그 코스모스의 전송을 받으면서 은륜을 밟으면 그렇게 기분이좋았던 그 시절, 산포면 사무소 근무했던 시절.............4 월 경부터 9 월까지의 한 6 개월의 근무였지만,그런 그리운 시절이 있었지.9 월에 갑자기 발령을 받고 떠나올때 아쉬워 하던 그녀.긴 생머리가 치렁 치렁하고 왠지 표정이 밝던 신 영순..깔깔 대는 웃음을 잘 웃던 그녀.두 명중 유별나게 자주 대화하던 여자가 바로 신 영순였지.- 동안 참 재밌었어요.부디 건강하세요.이런 인사하고 떠나 올때 왠지 아쉬웠던 산포면 사무소와 그녀.이런 가을이 돌아오면,늘상 그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과 그녀들과 어울려 지냈던 아름다운추억이 회상되어 그리워 지곤 한다.참 지금도 그 길에 가면 코스모스의 긴 행렬을 볼수 있을가?그리고 유난히 밝은 웃음을 잘 웃던 그녀는 어디서 살고 있을가?가을은,지나간 추억이 그리워 지곤 한다.아주 오래된 동화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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