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6 일째
잊을수 없는 친구
친구,그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뭉클한 그리움이다.내 주위에 친구들이 몇몇이 있지만,잊혀지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신 천식.그는, 거의 40 년이 다 되어가는 중학교 동창이다.나 보담,나이가 2 살정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어쩜 그렇게도 정신적으로 , 육체적으로 성숙했을가?3 년동안을 한결 같이 한 반에 있었단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마음이 통했던 것이 더 큰 이유이리라.난, 그를 형이라 불렀다.2 살의 연륜이 문제가 아니라,그는 모든 면에 나를 늘 압도하고날 동생처럼 그렇게 생각했다.그땐 , 한 반에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 몇명이 있었다.그들은, 그 나이탓에 학급을 주도해 갔었고, 애들을 리드하곤 했다.늘 교실 뒷자리에서 마치 형처럼 떡 하니 버티고서......... 나이가 많아도 난 이 형을 제하곤 형이라 부르지 않았지.그들은,나이만 많을 뿐.........모범적인 행동이나, 공부에선 나 보담도 못한 존재들이라 어떤 배울점이없었기 때문이다.별로 사교성도 없는 내가 그들과 가까이 한단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늘 우린 쉬는 시간이면,학교 바로 옆을 흐르는 영산강.영산강을 굽어보는 제방위에 앉아서 애기하곤 했다.-푸른 물결과 목포에서 영산포 까지 오가는 고깃배..-제방 맞은편의 약간 높은 곳에 서 있는 외로운 등대.-오른쪽 끝으로 강을 가로질러 걸쳐 있는 다리.우린 그런 정경을 바라봄서 대화를 했었지.그는 주로 애기 했고, 난 듣는 편.우린 진학 문제가 화두였다.지방의 고등학교냐?광주나, 서울로의 진출이냐?늘 괴로운 화두였다.그도 나도..............우린 서로가 가난하다는 것.그래서 인근의 중학교를 마다 하고 먼 학교까지 다녔단 것.그는 장흥군에서,난, 나주에서........우리학굔 유일하게 장학생 제도가 있었다.180 명중 10 명은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전액 면제.그도 나도 그런 행운(?)에 합격해서 다녔지.10 명중에....그는 2 등였고, 난 4 등였다.( 그 4 번째로 붙여진 합격자 명단........그때의 기분은 무어라 할수없는 환희, 그래 환희였으리라.......................)우린 다행히도 3 년간을 장학생으로 다녔었다.지금은,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가는 경우는 없었지만,당시는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수재(?)들이 많았다.불과 40 분 정도면 갈수있는 나주읍의 학교를 두고 2 시간의 먼 거리를다녀야 했던 괴로운 시절.동병상린( 同病相隣 )였을가?우린 그런 공통점으로 그와 가깝게 지냈다.약간은 특권의식에 사로 잡혔고,때론 선민의식 같은것..그런 감정도 있었을 거다.- 우린 너희들과 다르다.너희같은 범인과 다르다는 그런 자존심.그와 내가 졸업하고 헤어졌다.그는 서울의 < 성동고등학교 >에 무난히 합격했고.....난 무명의 지방 학교로 가고( 밝혀도 잘 모른 학교 ??)그가 부러웠다.서울에서 학교를 다닐수 있다는 행운.그는 분명 가난했지만,나 보담은 무척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그 헤어짐의 슬픔.그는 영광의 길로, 난 나락의 길로...( 그 당시의 나의 모습은 모멸감 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 없이 추락하는 그런 기분였다........)암튼 우린 정든 3 년간의 그 영산포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서로의 다른길을 가야만 했다.이게 인생의 길인걸....어쩔수 없는 숙명 같은 길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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