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5 일째
계몽군주의 정체(퍼온글)
계몽군주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 21세기, 그것도 언론계에서 그렇다. 누구를 이름일까. 남세스럽게도 방상훈 사장과 홍석현 회장이다. 딴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방 사장은 사뭇 귀가 솔깃한 말을 했다. “조선일보는 앞으로 건전 보수세력의 중심에 서서 리버럴한 사람도 포용해 나가야 한다.” 안티조선도 무조건 묵살할 것이 아니란다. 방우영 회장의 총애를 받는 김대중 주필과 방 사장의 깜냥이 다르다는 분석이 나돈 것은 오래 전이다. 밖에서 김 주필을 들먹여 되레 주필의 수명을 늘려준다는 `비판'마저 나왔다. 실제로 조선일보 사장실에서 만난 방 사장은 그 신문의 논조에 비해 합리적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방우영 체제로부터 권력을 승계받고 있는 방 사장은 참으로 다르리라고 기대해도 좋을까. `건전 보수'는 기실 방 사장만의 차별화전략은 아니다. 이미 홍 회장이 조선일보와 `차이'를 강조했다. 자신은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며 기자들에게 부르댔다. “현재 신문시장에 1등은 없다. 조선일보를 따라가선 1등이 될 수 없다.” 홍 회장의 `야심'이 묻어난다. 엄청난 자본력을 밑절미로 일부 진보적 논객까지 끌어들인다. 언론운동 일각에서 솔솔 계몽군주론이 나오는 까닭이다. 더러는 계몽군주가 언론운동의 성과라고 평가한다. 두 사람 모두 감옥생활을 하며 철들었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도 있다. 홍 회장이 작심한듯 변화를 외친 것도, 방 사장이 건전 보수를 내세운 것도 `별'을 달고 나서라는 풀이가 제법 짜하다. 두 사주는 괜찮은데 기자들이 문제라는 대담한 주장까지 나온다. `군주'가 미소지을 법하다. 오해 없기 바란다. 중뿔나게 두 군주의 `변신'을 시뻐할 뜻은 없다. 진정 변화를 이룬다면 기뻐할 일이다. 1980년대 말까지 `부동의 1위'였던 의 석양은 계몽군주론에 무게를 더해준다. 문제는 왜 새퉁스레 오늘 계몽군주인가에 있다. 독자들이 애면글면 벌인 신문개혁운동의 영향임엔 틀림없다. 동시에 그 운동에 대한 `응답'이라는 사실에 눈돌려야 한다. 대답의 성격은 무엇일까. 신문개혁운동에 `물타기'다. 계몽군주론은 지금 이 순간도 신문사 안에서 황제로 군림하는 신문권력의 정당화 이상은 아니다. 개혁 여론이 높아갈수록 신문권력은 세련되게 변할 터이다. 군사독재라는 분명한 과녁이 있을 때 민주화운동은 오히려 쉬웠다. 신문권력이 계몽군주로 변신할 때 언론개혁운동은 고비를 맞을지도 모른다. 기자와 독자들이 슬기를 모아 대처할 섟에 계몽군주에 혹한다면 숫보기 되기 십상이다. 역사에서 계몽군주가 부국강병으로 달려갔듯이 신문사 계몽군주 또한 1위를 겨냥한다. 분명히 짚어두자. 언론사 1위가 언론 1위는 아니다. 계몽군주는 발행부수 1위의 권력을 벅벅이 탐할 뿐이다. 결코 민주언론이나 통일언론을 꿈꾸지 않는다. 계몽군주는 계몽되었을 뿐 군주다. 군주를 계몽해 이상국가를 이루려했던 대표적 지식인의 운명은 어떠했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물며 조광조의 기개조차 없는 오늘의 언론계에서 계몽군주론은 허방이다. 계몽군주라는 말 자체가 자기모순을 벗어날 수 없다. 군주가 계몽될 때 더 이상 군주일 수 없다. 민주공화국 헌법으로 군주제에 꺾자를 쳤듯이, 정기간행물법 개정으로 언론사의 군주제를 바꿔야 한다. 혈연으로 신문사를 세습한 방상훈·홍석현 두 사주 두루 입이 쩍 벌어질 탈세를 저질렀는데도 보석으로 풀려났거나 사면을 받았다. 그럼에도 자성할새로에 “권력과 싸워 이겼다”고 공언하는 사주가 과연 계몽군주일까. 오늘 한국 신문에 아쉬운 것은 계몽군주가 아니다. 민주주의다. 두 사주가 참으로 계몽군주이기 위해서라도 언론개혁운동은 지금보다 더 활활 타올라야 한다.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핏빛으로 묻는다. 군주제를 스스로 폐지한 계몽군주가 있는가. 손석춘/ 여론매체부장[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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