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5 일째
거짓말 잔치 ( 퍼온글 )
언론개혁 논쟁과 관련하여 고영재 논설위원은 최근 칼럼에서 “`거짓말 잔치'도 축복”이라고 했다. 왜? “오늘의 말은 훗날의 거울이 되고 채찍이 될 것”이며 “때로는 언론과 지식인, 정치인들의 발등을 찍는 도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젠 질린다고 짜증을 낼 일이 아니다. `위기'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가서도 안 될 일이다. “위기라면 그것은 친조선일보 지식인의 위기일 뿐”이라고 명쾌한 진단을 내리는 진중권씨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엔 라는 거대 언론에서 지식인의 이름을 걸고 발언하면 곧 사회적 진리로 통용됐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지식의 외관에 속지 않는다. 지식인사회 안에서도 공개적인 논박이 이뤄진다. 그게 불편한 거고, 위기로 느껴진 거다.” 그렇다. 그간 수구 신문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든 죄악은 정치권에만 있는 것처럼 묘사해온 일부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수구 신문들과 일치시키면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문화특권'을 수구신문들과 더불어 누려왔다. 이제 그러한 유착과 문화특권에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지식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권력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신문권력이다. 지식인들의 `인정 욕구' 때문이다. 고려대 김우창 교수는 한국문학이 돈(Money)과 매스미디어(Mass Media)라는 두 M신(神)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고 개탄한 바 있다. 과연 문학만 그럴까? 나는 조선일보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내 의견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존중한다. 그러나 내가 결코 존중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자기 모순'이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들의 `자기 모순'은 매우 심각하다. 가장 코믹하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유형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앎과 삶을 분리시키는 유형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과거에 쓴 모든 글들을 다 찾아 읽어보고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마르크스에서부터 촘스키에 이르기까지 서양 좌파 지식인들의 언론 사상을 열렬히 옹호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한국사회의 `혁파'와 `재건'을 부르짖으면서 언론이 걸림돌이라는 주장까지 했던 지식인이 180도 회전을 감행한 사건이었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 장본인이다. 그는 1년 반 전에 낸 책에서 언론권력에 대한 정치권의 `눈치보기'가 심각하고, 언론의 독단적 견해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여론화되고 있으며, 언론의 여론재판으로 `사회적 담론 형성의 일원화'가 심각할 정도로 고착되었다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앎은 그렇지만 삶은 다르다는 걸까? 둘째, 나와 남에게 다른 잣대를 쓰는 유형이다. 조선일보를 옹호한 여러 문인들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그들은 평소 많이 팔린다고 좋은 소설은 아니라는 주장을 집요하게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신문에 대해서만큼은 많이 팔릴수록 좋은 신문이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조선일보 독자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주장, 아니 개그를 하고 있다. 셋째, 누워서 침 뱉는 유형이다. 나는 전여옥씨가 최근에 쓴 조선일보 예찬론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그가 조선일보를 예찬한 이유는 전형적인 `마초' 논리였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테러리스트'가 될 것을 권유했던 전씨는 `마초 페미니스트'인가? 물론 이는 `마초 사회'에서 한 여성이 성공하기 위해 자신이 남자를 능가하는 `마초'가 되어버린, 사회적 차원의 비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게 다 비극이다. “`거짓말 잔치'도 축복”이라는 건 우리가 그러한 비극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비극을 끝내기 위해 차분하게 그 `잔치'를 즐기도록 하자. 강준만/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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