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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63 일째

이 문열( 퍼온글 )

소설가 이문열씨는 최근 자신의 극렬한 언어 폭력에 대해 `곡학아세'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내가 아첨을 하려고 한다면 정부나 시민단체쪽에 붙는 게 낫지 왜 특정 언론의 편을 들겠느냐”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이 항변은 그가 1996년에 한 발언과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할 뜻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계산해서 수지가 안 맞습니다. 국회의원 자리나 기타 이렇게 영입됐을 때 정치권이 제게 줄 수 있는 게 뻔합니다. 그건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해방 이후로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수천 수만 명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곱게 늙는다면 이문열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이씨는 97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고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으로 따져봤을 때 웬만한 국회의원만큼은 되고 의원 봉급의 수십배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굳이 정치할 이유가 없잖은가”라고 답하였다. 따라서 그가 아첨을 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소설을 팔아주는 데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비대 신문들의 편을 드는 것이 수지가 맞는다고 볼 수 있겠다. 이씨는 `곡학아세'라는 비판에 대해 “정치인의 잣대로 문화인을 폄하하지 말라”는 주장도 내놓았는데, 이 또한 검증을 요하는 발언이다. 이씨는 과연 문화인인가? 다음과 같은 공개적인 언행들을 과연 문화인의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이씨는 1987년 문규현 신부에게 “차라리 사제복을 벗으라”고 호통을 쳤고, 89년엔 임수경씨를 “미친 계집애”라 불렀다. 그는 87년 대선에선 노태우씨를 밀었고 92년 대선에선 김영삼씨를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해” 밀었으며, 선거 결과가 자기 뜻대로 돌아가자 자신의 “세상읽기가 맞았다는 기분에 약간은 우쭐하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씨는 92년 대선때 에 연재하던 소설 을 통해 부산 초원복집 사건을 옹호하는 정치 프로파갠다를 자행하였으며, 김영삼 정부의 개혁성에 대해선 사사건건 통제를 시도했던 조선일보와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집단 히스테리'로 매도하였으며, “향후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그 집권자는 총 맞아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협박까지 불사했다. 이씨는 97년 봄 `대선의 계절'이 돌아오자 양비론을 빙자하여 “대권에 눈멀어 산적한 국내 현안들은 제쳐놓고 김칫국부터 마셔대는 그들(야당)에게도 섬뜩하게 반성하고 참회할 기회를 주라”고 호통을 쳤고, 가을엔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조순씨의 집을 방문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씨는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선 청와대의 국민신당 창당자금 지원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소설'을 써대고선 “신물나고 역겹기까지 한 정치 술수”로 모는 작태를 보였다. 이씨의 인생 최초로 자신이 원치 않았던 정부가 들어서자 이씨는 더욱 극렬한 행태를 보이면서 순수한 시민운동단체들에게까지 `홍위병'이라는 언어 폭력을 행사한 건 이미 천하가 다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렇듯 이씨는 문화인보다는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정치인 가운데서도 무책임한 언어 폭력에 의존하는 `선동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지독한 `양반 콤플렉스'를 앓고 있는 이씨는 자신이 “시정의 잡문을 담는 그릇”, 곧 소설가가 된 것에 대해 자신의 조상들과 문중에 대해 죄의식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씨가 문화인의 가면을 쓴 `선동 정치인'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건 없으나, 그게 과연 수지가 맞는 일인지 단기적으로 보지 말고 장기적으로 따져보는 게 어떨까? 곱게 늙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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