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일째
맘대로 하게 놔두라고 ?( 퍼온글 )
98년 말께로 기억된다. 어느 세미나 자리에서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과 가벼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손 부회장은 “(재벌들이) 계열사를 많이 늘린 것은 그 만큼 사업을 잘한 결과이니 이런 기업에는 상을 줘야한다”며 정부의 경제력집중 억제 정책에 불만을 표시했다. 난생 처음 듣는 논리전개라서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문어발식 사업확장의 국민경제적 폐해 등을 지적하며 잠시 논쟁을 벌이다 곧 그만 뒀다. 시각이 워낙 달라 더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해서였다. 손 부회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기업, 특히 대기업의 시각에서 보면 똑같은 경제현상이 이렇게 달리 보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것을 절감했다. 지난 22~25일 전경련 주최로 제주도에서 열린 `최고경영자 포럼'에서도 재벌들의 이런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손병두 부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인을 못믿을 사람들이라고 봐서야 어떻게 기업이 성장하겠느냐”며 30대 재벌 지정제도 폐지와 집단소송제 도입 재고를 또다시 촉구했다. 손길승 에스케이 회장도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 맘대로 하게 놔두면 잘 할 수 있는데, 정부가 각종 규제로 발목을 잡고 있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은 자본주의 경제의 근간이다. 기업, 기업가 정신이 없는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유스런 기업활동은 보장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달라'는 기업인들의 요구는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대한민국 재벌'들은 이런 요구를 하기에 앞서 몇 가지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한다. 우선 돈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집적거리는 재벌놀음을 더이상 안한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어야한다. 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된 데는 무분별한 재벌놀음도 한몫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외환위기 이후 벤처붐이 반짝 일자 재벌들은 앞다퉈 벤처투자에 나섰다. 결국 대기업들까지 가세해 부풀려 놓은 벤처거품이 한꺼번에 빠지면서 벤처업계는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이 신기술을 하나 개발해 사업이 될만하면 대기업이 뛰어들어 시장을 빼앗아가는 행태도 여전하다. 아직도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재벌들을 어떻게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수 있겠는가? 또 재벌들은 오너중심체제를 빨리 탈피해 전문경영인체제로 가야한다. 오너체제의 장점도 있긴 하다. 손 부회장도 “경영의 힘은 오너십에서 나온다”며 “오너가 신념과 책임감을 갖고 판단을 내려 추진해 나가는 오너십이 있어야 (기업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오너의 판단이 잘못됐을 때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김우중 회장의 일인체제 아래 있던 대우가 한순간에 풍비박산됐고, 정주영 회장이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현대그룹도 결국 갈갈이 찢겨지는 것으로 결말났다. 오너중심의 재벌 중 살아남아 있는 기업보다 망한 게 훨씬 많다. 그리고 지금 살아남아 있는 오너중심의 재벌도 얼마나 지탱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재벌이야 망하면 그만이지만 그로 인한 손실은 애궂은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이렇게 불안한 재벌들을 어떻게 그냥 놔두란 말인가? 마지막으로 재벌 경영인들도 이제는 좀더 제대로 된 기업가 정신을 가졌으면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사업하고자 하는 의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철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단순히 자신들만의 수익을 좇지 않고 국민경제를 생각하는, 그리고 대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힘없는 중소기업과 일반 국민들의 편익을 우선시하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재벌들이 최소한 이런 정도의 조건을 충족하고 난 뒤에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둬도 늦지 않을 듯 싶다.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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