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일째
진보 죽이기 ( 퍼온글 )
“근자에 들어와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일삼는 처신은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보수세력의 행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심히 유감스럽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공기업 대표이든 언론사 사장이든 감투 주면 얼른 받아쓰는 행태가 그러하고…” 한림대 사회학과 전상인 교수가 최근 어느 신문에 쓴 칼럼에서 한 말이다. 나도 `진보를 자처하는 인물들'에 대해 어지간히 많은 비판을 해온 사람인지라 전 교수의 주장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전 교수의 칼럼엔 수구 신문들의 전매 특허라 할 전형적인 `진보 죽이기'의 논리가 충만해 아무래도 한 말씀 드려야겠다. 나는 우리 국민 다수가 수구 신문들이 필사적으로 유포시켜 온 `진보 죽이기' 논리에 오염돼 있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서 한두번 겪은 게 아니다. `진보'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시큰둥해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보'에 대한 이미지는 `춥고 배고픈' 것이다. `진보'는 늘 저항하고 투쟁만 해야 한다. `진보'가 티끌만한 권력이라도 갖게 되면 그건 타락이다. `진보'가 그런 이미지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그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재미있다 못해 어이가 없는 건 그런 비난을 일삼는 수구 신문들은 기회만 있으면 `진보 대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 대 반민주' 또는 `개혁 대 반개혁'의 구도를 부정하기에 바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과 투쟁을 욕한다. 그러나 `진보'가 저항과 투쟁 대신 `감투'를 쓰면 이젠 또 감투를 썼다고 욕한다. 이래도 욕 먹고 저래도 욕 먹게끔 돼 있는 것이다. 나는 왜 `진보'가 늘 춥고 배 고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수구 기득권 세력은 아무리 개판 쳐도 당연시되는데 왜 `진보'는 조금만 잘못하면 그걸로 끝장나야 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다. `진보'가 장관, 국회의원 , 공기업 대표, 언론사 사장을 하면 안된다는 게 우리 헌법에 명문화돼 있는가? `진보'는 도대체 언제까지 춥고 배고픈 삶을 영위하면서 권력과 금력을 장악한 수구 기득권 세력의 들러리 역할을 해줘야 하는가?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건 `진보'에 대한 그런 황당한 주문은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학생 시절엔 `진보'였다가도 사회에 진출하면서 `보수'나 `극우'로 변하는 것도 `진보'에 대한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까지 춥고 배 고프게 살 순 없기 때문에 이젠 `진보'를 버려야겠다는 식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한국인들은 한국인 절대 다수가 원치 않는 사회 구조와 관행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가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아니 `진보'에게는 목구멍도 없는가? `진보'를 고수하면서 최소한의 품위 있는 생계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냐 이 말이다. 이미지는 허구일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진보'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을 `투쟁 아니면 굴종'이라는 잘못된 양자택일의 구도로 내몰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분명히 그 중간의 삶이 있다. 나도 잘 되고 너도 잘 되는 그런 삶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진보'도 이런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 책임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에겐 내가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대표, 언론사 사장'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걸 고민해보는 역지사지의 정신이 부족하다. 영원히 권력은 악이고 권력은 가질 수 없다는 전제하에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도덕 지상주의'를 앞세우며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저지르는 무책임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 죽이기'를 끝장내야 할 주체는 바로 `진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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