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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일째
빗나간 세계화의 그림자(퍼온글)
청담동은 외로운 섬이다. 그곳에서는 전통적 가치 대신 서구적 가치가 존중되고 개인주의가 넘실댄다. 높은 학력, 특히 외국 유학 경력에 고소득자가 활개치는 거리이자, 전혀 다른 소비문화가 숨쉬는 곳이다. 세계 일류의 명품을 만날 수 있으며, 외국문화가 그대로 재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적이 거북살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한 전문가는 진단한다. '불일치 부조화 고립성이 청담동의 공간적 특성이다.'( 5월3일치에서) 청담동 문화를 무작정 시비할 일은 아니다.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 있다. 이른바 세계화의 실험 현장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청담동은 분명 낯선 거리다. 루이뷔똥이 그 자태를 뽐내는 거리에, 수만원짜리 쿠바산 시가가 있고, 고급 승용차가 주차할 때는 충실한 `시종'이 날쌔게 움직이며, 홍차 한잔 마시자면 1만원을 내야 한다. `홍차 전문가가 격식에 따라, 좋은 다기에, 제대로 끓여낸 그맛'에 돈이 아깝지 않단다. 명품 진열장과 고급 카페의 그윽한 분위기는 선진 외국 여느 도시 그대로란다. 때로는 오랫동안 해외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향수병'을 달래주는 명소이기도 한단다. 청담동은 세계화의 `창'인 셈이다. 그러나 `문화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어쩐지 마뜩치 않다. `문화'는 없고 `외제 물건'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신주의의 허울만 너울대고 있는 느낌이다. 단순한 소비패턴의 변화가 문화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어줍잖은 세계화가 빚어낸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청담동의 배타성은 그 판단에 확신을 심어준다. 불일치 부조화 고립성은 청담동의 개성이라지 않는가. 그만큼 보통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다. 선민의식과 배타성, 청담동 문화를 간명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평범한 것은 싫다'는 청담동 문화는 출신성분이 다른 이들의 접근을 아예 거부한다. 청담동 문화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같을 수 없다는 거부감에서 싹텄다고 봄직하다. 또한 평범한 이들에게는 강렬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며 그 존재의의를 과시하고 있다. `청담동 사람들'은 평범한 이웃과의 동아리를 거부한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부조화를 은밀히 만끽하는 청담동 문화는 확실히 병적이다. 청담동 문화는 강자들의 놀음이기에 더욱 그렇다. 힘을 무기로,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웃과의 불일치를 겁내 하지 않는 분위기가 이를 입명한다. 계층사회, 아니 새로운 계급사회를 그들은 꿈꾸는지도 모른다. 자칫 사회가 동강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징후를 느낀다. 문제는 결코 청담동이 좁지 않다는 점이다. 또다른 청담동은 곳곳에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세계화, 국제경쟁력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경제의 자주성은 이미 사라졌다. 세계화는 노동자들을 내모는 이데올로기로서도 제격이다. 노동자들의 시위는 무자비하게 탄압된다. 외국자본과의 기업인수 협상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그 명분이다. 초등학교 영어교육은 국적없는 교육의 위험성을 낳고 있다. 미국문화를 동경하는 아이들의 입맛부터 바꾸어 놓았다. 조기유학은 그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채 정당화되고 있다. 농민들은 아무런 잘못 없이 그 생업을 위협받고 있다. 수입생우를 반출하는 트럭을 온몸으로 저지하는 농민들의 절규에는 메아리가 없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일이다. 이는 힘 있는 자, 가진 자들만의 특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세계화는 재앙일 수 있다. 나라의 자주성, 인간의 존엄성, 고유문화가 존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세계화의 전제조건이다. 끝모르는 개인주의와 물신숭배가 세계화의 참뜻은 아닐 터이다. 세계화가 곧 서구화는 결코 아니다. 고영재/논설위원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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