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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0 일째

개털과 사회 지도층(퍼온글)

지금도 군에 그런 관행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입대해 신상명세서를 쓸 때 `친인척 중에 군 영관급 이상 장교나 정부부처 국장급 이상 고위공무원이 있으면 이름을 쓰라'는 항목이 꼭 들어 있었다. 쉽게 말해, `빽'을 밝히면 여러모로 `참고'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힌 셈이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보아도 주변에 하다못해 풋내기 소위 한명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은 초장부터 팍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한가닥 희망이 있기는 했다. 바로 동료 중 군 고위층과 선이 닿아 있는 사람 옆에 `줄을 서는' 것이다. 배경있는 사병을 좋은 부대로 배치할 때 해당자 한 사람만 밭에서 무우 뽑아내듯 빼내기란 힘들다. 그래서 앞뒤로 적당히 끊다보니 운만 좋으면 친구 덕택에 `덩달이'로 좋은 부대에 배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군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싶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방부대 말단 소총수까지 내려오는 병사들은 대부분 별다른 배경도 없고 그나마 `친구 운'도 없는, 시쳇말로 `개털'들이었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철책경계를 맡고 있던 우리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배운 것 없고 배경없는 그들이야말로 순박하고 성실한 진정한 군인들이었다. 묵묵히 자기 맡은 일을 수행하고, 조그만 일에도 기뻐하며 슬기롭게 군생활을 해나갔다. 그들이 차가운 겨울밤 철책에서 오돌오돌 떨며 하얗게 밤을 새고, 뙤약볕에서 2박3일 200㎞ 행군을 하며 고된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때, 바깥 사회에서는 군대 면제를 위한 갖가지 탈법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자력갱생파'도 적지 않았다. 몸무게를 빼거나 줄이거나 하는 따위는 가장 초보적인 수법이고, 눈을 나쁘게 하기 위해 태양 바라보기, 악취로 빠지기 위해 몇달씩 양치질 안하기 등 각종 기발하고 눈물겨운 노력이 동원됐다. 이런 자력갱생파는 그래도 애교로라도 봐줄 수 있다. 아예 처음부터 군과 짜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음이 지난 98~99년 병역비리 수사에서 드러난 바 있다. 병역비리의 `몸통'으로 불리던 박노항 원사가 드디어 붙잡혔다. 그가 잠적하는 바람에 미완의 상태에 머물렀던 병역비리 수사도 재개됐다. 흔히 하는 말로 “군은 `계급과 보직'이 아니라 `보직과 계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계급이 높아도 핵심 보직의 하급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빗댄 말인데, 박 원사의 경우야말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 예가 아닌가 싶다. 결혼식 등 모임이 있으면 장성급들이 먼저 찾아와 박 원사에게 인사를 건넸다고 하니 가히 그가 맡았던 직책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따라서 돈을 매개로 한 병역비리 외에도 `말 한마디'나 `전화 한 통화'를 통한 비리도 수없이 많았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수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초기단계여서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벌써부터 `큰 기대는 금물'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리스트에 정치인은 없다”라든가 “박 원사가 워낙 자물통 입”이라는 따위의 전언도 그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하기야 그동안 정태수 리스트를 비롯해 숱한 `리스트 열전'이 있었지만, 막상 속시원히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허탈증만을 안겨주고 막을 내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아직은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 그 부패와 비리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길 국민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병역비리 연루설이 나돌고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혐의사실도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누가 누구를 지도하느냐는 점에서 `사회지도층'이라는 용어 자체는 매우 부적절하지만, 이름이야 어찌됐든 파렴치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정말로 `사회의 지도를 받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김종구 민권사회2부장 - 한겨레 신문컬럼에서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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