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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62 일째

살고싶은 나라가 되려면 ( 퍼온글 )

한때는 독재자 이승만에 대항해 싸우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유석 조병옥이 범친일파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러 논란이 일고있다. 범친일파로 모는 꼬투리는 일제가 물러가고 난 해방 후의 그의 행적에 있다. 그는 미군정의 경찰 총수인 경무부장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경찰의 초석을 놓은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친일 경찰을 대거 기용해 결과적으로 친일적 정서가 주조가 되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친일행각이 별로 보이지 않는 그를 범친일파로 분류하는 것은 심하지 않는가 라는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세력을 대거 기용한 오늘의 국민의 정부는 범유신세력이란 말이냐고 대든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우선, 나는 친일파를 규정하는 데 있어 지나친 엄격주의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지금이야 배불리 먹고 등 따스운 방에 누워 쉽게 생각하지만 당시의 엄혹한 사정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목숨 부지하기 위해 또는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한 생업까지 일제 통치에 대한 협력이었다고 해서 친일파로 몬다면 그때를 산 사람치고 살아남을 사람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인정식 김한주(모두 해방 후 월북) 같은 경제학자도 부분적으로 친일을 했고, 이용악 임화 등 시인, 김남천 같은 작가도 친일적 행위를 했다. 이들을 도매금으로 친일파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들은 살아남아야 했고, 장렬하게 죽는 것보다 살아 남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순리였을 터이다. 문제는 적극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하나 더 잘 살기 위해서 친일행각을 벌인 사람들이다. 더 나쁜 경우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친일을 한 인사도 있었으니 육당 최남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1937년 연변 등 만주 일대를 여행한 기행문 `송막연운록'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면서 조선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를 돕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아주 그럴 듯하다. 중원은 원래 주인이 없는 땅으로 변방에서 강력한 민족이 일어나 들어가 차지하게 되어 있는바, 이제 일본이 그러한 민족이 되었으므로 조선 민족은 순리에 따라 일본을 적극 도와야 하며, 이 기회는 조선 민족을 위해서도 큰 행운이라는 요지이다. 순문예지 이 창간된 것이 1939년이니까 이때만 해도 일제의 지식인 포섭이 본격화하지 않았을 때다. 육당이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증거다. 이와 같은 적극적 친일파와 부득이한 친일파가 엄격히 구분되면서 전자가 철저하게 숙청되는 사회가 되지 못하고,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어데 있느냐는 식의 온정주의가 판을 치면서 친일적 정서가 그대로 유지되어 온 것이 우리 사회다. 이 점, 범친일파라는 명칭은 좀 심하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일제의 경찰 조직을 온존시킨 유석에게 책임이 있다. 문제는 “훈련된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친일파 기용의 변이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는 점이다. 3당야합으로 정권을 잡은 문민정부의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자민련의 도움으로 집권한 국민의 정부의 사람이 없다는 구실을 단 유신세력 대거 기용도 똑같은 닮은꼴이다. 요즘 주류 운운하는 논란이 시끄럽지만 그 주류가 친일에서 독재로 이어지는 기간중 계속 지배적 위치에 있던 계층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정말 희망이 없는 나라다. 주류는 마땅히 일제시대 민족독립운동을 한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의 대권은 이런 친일적 정서를 척결할 수 있는 민주화 세력에서 나와 이들로 하여금 이땅의 새 주류가 되게 하는 것만이 우리나라를 밝고 아름다운 나라로 만드는 길이고, 외국으로 이민가고 싶다는 사람을 없애는 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경림/시인 ( 한겨레 신문컬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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