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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5 일째

뒤바뀐 머슴과 주인 ( 퍼온글 )

얼마전 청와대 앞을 걸어서 지날 일이 있었다. 인근에 있는 중고교에 다니면서 6년 동안 자주 거닐었던 길이다. 오랜 만에 청소년 시절의 옛 추억을 되새기며 걷는데 경비경찰관이 길을 막았다. “직원이시면 신분증을 패용하시고, 직원이 아니시면 건너편 길을 이용해 달라”는 요구였다. 내가 가던 길은 청와대 경내가 들여다 보이는 철책을 끼고 있는 인도였고, 건너편 길은 경복궁 돌담을 끼고 있는 길이었다. 기가 막혔다. “여보, 사람이 인도로 가는데 왜 길을 막느냐”며 벌컥 화를 내고 가던 길을 계속 갔지만 불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매년 벚꽃철이 되면 청와대는 경내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해 잘 가꿔진 청와대 구내를 시민들과 함께 즐겼다. 방문 학생들에게는 기념품으로 청와대 문양이 새겨진 연필을 선물하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70년대 중반 유신독재가 강화되면서 청와대 앞길과 일대 도로는 일반 시민과 차량의 통행이 전면 금지됐다. 다니는 시민과 차가 없는 청와대 일대는 생기를 잃었고, 괴괴하고 흉칙한 분위기였다. 급기야 인적이 끊긴 궁정동 안가에서 술판을 벌이던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청와대 앞 도로는 적막의 거리로 계속 죽어 있었다. 청와대 일대 도로가 생기를 다시 찾게 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후 인왕산 및 청와대 일대 도로의 개방을 지시한 후였다. 그러나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서도 청와대 일대 도로는 아직도 권위적이다. `사고' 가능성 때문에 청와대 울타리를 끼고 일반인들이 걸어가는 것은 금지되고 있다. 청와대 일대를 통과하는 자동차는 시속 30~40km 미만으로 서행해야 하며, 야간에는 전조등을 꺼야 한다. 무성한 가로수 때문에 가로등이 제 구실을 못해 어두컴컴한 길을 거북이 걸음으로 지나가야 한다. 또 매일 오후6시30분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청와대 앞길은 여전히 전면 통제되고 있다. 이같은 통제는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있거나 휴가를 떠나 청와대가 비어 있을 때도 계속된다. 경호 경비에 별 문제가 될 게 없는데도, 시민의 길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다. 어디 청와대 뿐만인가. 국무총리가 집무하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한 번 가보자. 이 청사에는 행정자치부 외교부 통일부 교육부 등 주요 부처가 모여있는 `중앙청'으로 볼일을 보러 드나드는 시민들이 많다. 그러나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들은 정문 반대편에 있는 후문을 통해서만 드나들게 돼있다. 정부수립 이후 중앙청 시절을 거친 지금의 청사까지 수십명의 `훌륭하신' 총리들이 거쳐 갔지만, 백성들은 아직도 뒷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국회도 마찬가지다.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외치는 국회의원들이 드나드는 문과 민초들이 드나드는 문은 다르다. 국회의사당이나 의회회관을 찾아 정면에 나있는 번듯한 현관 쪽으로 접근하면 어김없이 제지를 당하고, 건물을 한바퀴 돌아 반대편에 있는 민원인 출입구를 이용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장·차관이나 국회의원이 드나드는 문을 일반인이 다니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벼슬아치들의 머리 속에 시민들을 천시하고 무시하는 고약한 관존민비 사상이 강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선거 때면 `서민의 벗'을 자처하며 시장 구석구석까지 쫓아 다니며 악수공세를 펴던 사람들이 권력만 잡으면 유권자들을 거추장스런 존재로만 여기기 때문에 이같은 안하무인격의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청와대나 종합청사나 국회가 진정으로 국민들 곁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담장을 허문다는 각오로 경호 경비에 일신을 해야 한다. 경비 편의주의적 통제를 계속하면서 민주주의를 운운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민원인이나 통행인들을 `상전'으로 모시기 위한 가시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 봄기운이 완연해지고 있다. 올봄 상춘기에는 30여년만에 시민들이 나라의 큰 머슴이 사는 청와대 구내로 봄나들이를 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상현 문화부장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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