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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日目
안개의 도시 ( 퍼온시 )
임동윤 : 1948년 경북 울진 출생 전망 좋은 방이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노랗게 물든 길을 새벽 안개가 지우고 간다 더러는 바람과 어우러져, 빌딩과 숲 사이 좁다란 골목까지 슬그머니 점령한다 가로등 불빛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워버린다 밤새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후미진 골목에 아픔으로 쌓이고 몰래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몸을 섞는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국물들 외롭게 뛰쳐나와 와와 소리치는 술병들 안개는 그 위에도 군림한다. 이 도시의 가장 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싸고 돈다 안개 속에 좀처럼 잠 깨지 못하는 도시 도청지붕에서 아침햇살은 젖은 안개를 하나썩 꺼내 말린다 요선동의 허름한 집에서는 해장국이 펄펄 끓고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간밤의 숙취를 푸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한결 든든해져가고 가을의 피가 마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잎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에 쌓이고 환경미화원들의 새벽이 더욱 바빠진다 청소차에 실려나가는 푸른 꿈의 잔해들 첫눈이 오면서 다시 도시는 얼어붙을 것이다 겨울 안개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도시, 안개는 이 도시의 전유물이다 한낮이 되도록 가시지 않는다 쿨룩쿨룩 누구나 겨울에 한번쯤 기관지를 않는다 댐이 생기면서 깊어진 질환이다 나는 곤혹스럽다. 겨울에 더욱 살아서 꿈틀대는 것이 물이 얼면 가장 늦게 풀리는 도시 그래서 여기 사는사람들은 누구나 얼음을 즐긴다 스케이트를 못 타는 사람은 여기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안개는 자욱하고 한낮이 될 때까지 모든 사물을 몸에 가둔다 그래서 몸에서는 짙은 우유냄새가 난다 겨울 내내 도시는 안개 속에 취해 있고 자동차도 전조등을 켜고 다녀야 한다 더러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낮이 되고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비로소 나도 바빠진다. 햇살이 벽을 타고 방바닥에 깊이 박힌 후에야 거리로 나선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에서 사람들은 씽씽 바람을 가르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신나게 하늘에다 연을 날리고 있다 민망하다 너무 초라하고 연약하여 나는 부끄럽다 재빨리 빙판을 벗어난다 에메랄드에서 뜨거운 한잔의 커피로 몸을 푼다 땅거미가 깃들면 전망 좋은 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스멀거리며 안개는 기어들 것이다 어둠과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안개와 속삭이며 잠들 것이다. 잠들기 전 닭갈비와 막국수 몇 잔의 소주와도 친화할 것이다 쿨룩쿨룩 오랜 천식을 잃으며 나는 기다린다 창문도 최대한 크게 열어 놓는다 그러나 아직 안개는 침입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면서 자동차의 소음도 낮아지고 도시는 조금씩 기울어지며 호수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새벽쯤에야 슬그머니 방문할 모양이다 - 1996 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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