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일째
극장 (옮긴 글 )
갑갑한 일상의 비상구, 시네마천국 남루하고 누추한 현실… 이 세상밖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다 영화관을 찾는다 다른 삶을 꿈꾼다 명멸하는 스크린 속 상큼하고 포근하고 황량하고 황홀한 환상…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극장문을 나선다 극장은 꿈의 공간이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다른 삶'을 꿈꾼다. 극장에는 남루하고 갑갑한 일상과는 다른, 무언가 빛나는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반드시 돈과 권력과 사랑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자신의 전존재를 걸어볼 만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온통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들을 통째로 빨아들일 만큼 커다란 화면에서는 상큼하고 시원스러운 이스트만 칼라와 포근하고 따스한 테크닉 칼라와 황량하고 푸르스름한 딜럭스 칼라가 아름답고도 황홀하게 펼쳐지고는 했다.” “수많은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이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저런 아름다운 곳으로, 생활의 때가 묻지 않아 마음에 드는 곳 어디론가 멀리 가보고 싶다고.”(이상 안정효 ) 영화 속 환상, 극장밖 현실 안정효의 장편소설 는 영화의 매력에 빠져든 나머지 영화 속 환상과 극장 밖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죽어간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1950년대 후반 서울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닌 학생들이 보았음직한 수많은 영화와 배우·감독들 이름을 나열하면서 한 시대의 문화적 초상을 그려낸다. 극장 안팎의 이런저런 풍물들, 그리고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주인공들이 펼치는 다종다양한 모험과 기행에 가까운 노력은 동년배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호기심 왕성하고 생의 에너지가 약동하는 소년들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야 일견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헐리우드 키드' 임병석은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적이다. 영화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박식한 그는 반대로 현실 감각은 떨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부단히 영화 속 세계를 동경하였지만 그 때문에 더 비참한 삶을 꾸리다가 요절하고 만다. 시인 유하는 스스로를 `세운상가 키드'로 지칭하지만, 그의 시들은 그가 안정효 못지 않은 할리우드 키드임을 말해준다. 그와 안정효 사이에 놓인 20여 년의 세월이 영화 제목과 배우 이름에 어느 정도의 차이를 낳기는 했어도, 그 역시 안정효 못지 않게 극장 문턱을 닳구면서 몸과 마음의 키를 키워왔다. “내겐 첫번째 꽃소식이었지요/동굴 밖 눈부신 빛처럼/영화는 시작되었어요/눈 푸른 여주인공은 에로스의 화신/그녀는 내게 극장의 우상이었지요”(유하 ) “입장료 대신 보리쌀 한 되씩 주고 보던/신성일 엄앵란의 맨발의 청춘/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집어삼키며/굵은 비 내리는 화면 속으로 질척질척 빠져들어가던/그렁그렁한 눈동자들, 그리운 그 눈동자들…”(유하 ) 김현이 유하를 일러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라고 했을 때 그가 중독됨과 동시에 반성하는 키치의 대표는 역시 영화였다. 그는 영화를 통한 사회 들여다보기의 시도라고나 할 `영화 사회학' 연작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자신의 시 를 각색한 영화를 직접 감독한 `영화인'이기도 하다. 안정효의 소설과 유하의 시에서 극장은 곧잘 추억을 환기시키는 공간이 된다. 그것은 또 이들의 경우만도 아니어서, 비슷한 제목을 가진 이종암과 박형준의 시들에서도 마찬가지의 정조가 만져진다. 두 작품 모두 동시상영관이라는, 변두리의 허름한 극장을 소재로 삼고 있는 점 역시 이채롭다. 낡은 동시상영관의 추억 “지금은 낡은 필름으로 포개어지는/그/리/운 남도극장의 잿빛 그 곡두,/대형 할인마트 새 건물이 들어선 자리/지워지지 않네, 시간이 흘러도/극장 안 화장실 들어가는 긴 복도 어둔 길에/나를 만든 냄새, 색깔들 아직 거기에 머무는”(이종암 ) “휴식은 버려진 휴지처럼 구겨진 내 인생의 막다른 골목/애인이고 죽은 누이이고 그래서 긴 주소를 가진 변두리의/낡은 구두가 쉴 곳 동시 상영관이 아니고 무어라고/대답할 수 있겠나”(박형준 ) 한창훈의 단편 역시 동시상영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공단 잡부로 발기부전을 의심하는 중년 사내와 삼수생 청년, 그리고 소설가인 `나' 세 사람이 썰렁한 변두리 극장을 찾았거니와, 이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배우의 거웃 한 오라기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가위질' 하는 자들의 월권에 대한 분노에서는 하나가 되지만, 그 밖의 다른 공통점은 없는 인물들이다. “사내는 서지 않는다고 했고 삼수생은 공부가 전혀 안 된다며 마음 잡아야죠, 소리만 연거푸 뱉어냈으며 나는 소설이 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대목에서 보듯, 이들은 철저히 파편화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전혀 다른 타인들을 두고 의 지은이 아르놀트 하우저는 “이질적이고 불투명하며 무정형의 군중”이라 표현했다. 무정형의 군중과 권력 박태순의 단편 은 이런 무정형의 군중이 권력자의 소유인 극장을 파괴하는 모습을 통해 해방과 혼란이라는 4·19 혁명의 두 얼굴을 추출해 보여준다. 그 군중은 아마도 황지우의 시 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듣느라 일제히 일어난 “우리”와 동일인들일 터이다. 세상을 뜨는 을숙도의 새떼들을 보며 “우리도 우리들끼리/낄낄대면서/깔쭉대면서/우리의 대열을 이루며/한세상 떼어 메고/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고자 했으나 “대한 사람 대한으로/길이 보전하세로/각각 자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 일정한 계기가 주어지면 그들은 혁명의 주력군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에 수십 내지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홀로 명멸하는 스크린을 일제히 주시한다. 극장에서 연출되는 이런 장면은 고대 사회의 악마적 의식을 닮았다. 게다가 스크린에 비치는 것이 흡혈귀나 괴물이 주인공인 공포 영화라면 그 유사성은 한층 뚜렷해진다. 이라는 시에서 남진우는 “실컷 피를 빨리고/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극장문을 나서는/세기말의 밤”을 그리고 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던 그 심야상영관”을 찾아 “그의 시집을 덮고 잠시 아주 잠시/죽음같이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는 에서도 극장은 죽음과 삶 사이의 친화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최재봉 기자 ( 한겨레 신문에서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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