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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일째
철학자여..도올은 도올이다!` (퍼온글)
최근 고려대 서지문 교수(영문학)가 중앙일보(9일자)와 문화일보(12일자)에 기고한 칼럼이 화제가 되고 있다. ▶중앙일보 칼럼 '소인이 군자를 講하는 시대'▶문화일보 칼럼'공자의 말씀과 후학의 혀'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글이 모두 한 사람을 겨냥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14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 현상을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연속으로 게재된 칼럼이 한 사람을 겨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서교수가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KBS에서 '도올논어'를 강의하고 있는 김용옥 선생. 서교수는 중앙일보 칼럼 '소인이 군자를 강하는 시대'에서 도올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서두가 이렇다. '유교적 군자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김용옥 교수가 논어를 강의한다고 했을 때 근심스러웠지만 설마 공자의 가르침마저 훼손하기야 하겠는가 했다.' 문맥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글에서 서교수는 도올이 공자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다며 거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몇 대목을 인용해 보면. → 몇 달이 지난 지금, 김교수의 변모를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 것은 물론 공자님의 가르침이 진흙탕에 내던져졌다는 위기감이 든다. →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기를 알아본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비판을 받으면 분해서 펄펄 뛰는 김교수는.... → 김교수의 KBS 강의준비 부실이나 강의태도를 보면....... → 이런 사람이 소인이 아니라면 누구를 소인이라 하겠는가. 도올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강의를 해서는 안될 위인이 강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니 강의를 그만 두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서교수의 도올 비판에는 명확한 근거가 있는가? 중앙일간지에 기고해 한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이 글은 의심에 여지없는 객관적 증거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그러나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는 학문적으로 도올을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서교수는 무엇을 근거로 도올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쌍소리를 잘한다, 겸손하지 못하다, 자화자찬이 심하다, 핏대를 올린다, 쇳소리를 남발한다, 거침없이 말한다, 천박함이 느껴진다... 등이 서교수가 내세운 근거다. 문화일보에 기고한 칼럼 '공자의 말씀과 후학의 혀'에서 서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교수의 논어강의는 이제 겨우 2편에 진입했는데, 나 같은 문외한이 보아도 명백히 틀린 해석이 둘이나 있었다.' 9일자 중앙일보 칼럼이 지나치게 개인적 감상에 기초한 비판이라는 생각에서였는지 12일자 칼럼에서는 도올의 주장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그 두 가지는 다름 아닌,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穩 不亦君子乎)'와 '사무사(思無邪)'에 대한 것이다. 먼저 앞에 부분에 대해 도올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내가 군자다'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해 서교수는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공자가 그처럼 말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사람의 해석이다.' 그리고 나서는 '공자가 라고 자화자찬할 사람인가'라고 반문한다. 이에 더해 공자를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자에 대한 모독이고 공자를 숭앙하는 모든 선비들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모든 선비들의 심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정말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문맥으로 볼 때는 추측을 기반으로 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또 자신을 (동양철학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소개해놓고는 '공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사무사(思無邪)에 대해 도올은 '공자가 남녀간 사랑을 예찬한 표현'으로 해석했고 이에 대해 서교수는 '이는 공자를 모르는 사람의 해석이다'라며 공자가 사랑을 예찬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무사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 즉 '생각에는 간사함이 없다'가 올바른 해석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 서교수에 대한 네티즌의 평가는 도올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양분되고 있다. 전적으로 도올에 대한 감정에 편승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도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서교수의 글에 대해 지지의 입장을 명확히 한다. 도올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은 서교수의 비판이 말이 안 된다며 역으로 서교수를 비판한다. 한 시청자는 서교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서교수는 그렇다면, 예컨대 세익스피어의 주옥같은 모든 작품을 완벽히 해석하고 있는가. 교육은 지식의 전달뿐만 아니라,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흥미 유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교수가 요구하는 태도로 강의를 했다간 시청률 때문에 강의가 지속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한 네티즌은 이렇게 도올을 옹호하고 있다. '일반인이 접하기 어렵고, 딱딱한 학문을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린 도올의 강의는 재미있습니다. 그 내용이 정말 정확한지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어려운 학문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요. 제가 한마디 드린다면 아무리 좋고, 유익한 학문이라도 그들만 알고 이해하는 그들만의 학문이라면 개똥철학이 아닐까요?' 서교수를 옹호하며 도올을 비판하는 네티즌도 상당수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도올을 비판한다. '무릇 동양학에서는 지식의 많고 적음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그 지식이 자신의 내적으로 얼마나 체화되었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다. 그런데 도올은 어떠한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은 도올의 강의실력을 인정한다. 우선 그가 강의하면 재미있다는 것이다. 100회를 기획 중인 '도올의 논어이야기'는 이제 36강을 끝냈을 뿐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비판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적극 수렴해서 그를 성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도올에게 기대해 본다. 서교수는 도올을 비판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숭고한 학문이나 사상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인문학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겸손은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지 숭고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 한겨레 신문컬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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