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3 日目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퍼온글)
단일민족의 신화는 허상일 뿐… 그 의식 속엔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널리 퍼져 있다. 60, 70년대에 비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성원 모두가 ‘단군 할아버지’ 자손이라는 말은 아직도 흔히 들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으로부터 퍼져나와 혈연적으로 연결된 단일민족일까? ‘단군 할아버지론’은 난폭한 주장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과 함께 이 땅에 온 3천의 무리나 단군이 다스렸던 백성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그들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기자의 후손을 표방한 사람들의 도래에서부터 고려 초기 발해 유민들의 집단 이주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대규모로 인구가 유입된 사례는 수없이 많다. 또 거란, 몽골, 일본, 만주족 등의 대대적인 외침과 한국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단일민족 의식은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려보자. 종이의 맨 아래에 나를 표시하고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고 각각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를 표시하는 식으로 그려보면 종이는 금세 꽉 찰 것이다. 대략 고려 말, 조선 초에 해당될 우리의 25대조 항렬로 거슬러올라가면 우리는 수천만명의 조상을 갖게 된다. 물론 중복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니 그 수는 크게 줄어들겠지만 ‘단군 할아버지’ 시대로 거슬러올라가면 계산상 우리는 2의 100승(乘)을 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숫자의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는 실존했다 하더라도 그분들 중 한분일 뿐이지,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분의 조상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이 모두 퍼져나왔다는 것은 극단적 민족주의와 부계 혈통주의가 결합된 아주 난폭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조로서의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과 한민족 전체의 공통조상으로서의 ‘단군 할아버지’를 받드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이다. 각 성씨의 족보를 보더라도 자기 조상이 중국으로부터 도래했다고 주장하는 귀화 성씨가 적지 않다. 또 한국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인 김씨나 박씨를 보더라도 그 시조는 알에서 태어났지 단군의 후손임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족보가 처음 편찬된 조선시대 중기나 후기까지는 적어도 ‘단군 할아버지’라는 공통의 조상을 모신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또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된 전통사회에서 노비 등 천민과 지배층이 같은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의식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뻗어나온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처음 출현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올려잡아도 한말 이상 거슬러올라갈 수 없고, 이런 의식이 전 국민적으로 보편화된 것은 좀더 세밀히 연구해 보아야겠지만 신분제와 신분의식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들어와서 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 처음 출현한 국가의 창건자로서 정치적인 군장이자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임금을 가리키는 칭호였던 단군은 어느새 ‘단군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탈과 분단을 겪은 20세기에 단일민족의식은 민족의 단결을 고취하고, 신분의식 타파에 기여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란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 아니라, 단일민족의식이 역사의 발전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나갔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단일민족을 내세우는 것의 순기능이 아직도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명백히 같은 핏줄에 한국어를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들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조선족 동포들의 처지를 보면, 그리고 출신에 따라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을 떠올리면 같은 민족끼리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갈라진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한겨레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잠깐! 과연 단일민족의식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는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단일민족임을 외쳐왔지만 이런 문제들은 오히려 더 악화되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등신민’의 저주받은 유산 이제 우리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민족이라면 차별해도 괜찮다라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보다 더 강하게 하나의 민족, 하나의 조국, 하나의 언어를 내세운 나치 독일은 600여만의 유대인 학살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으로 나아갔다. 물론 이런 가능성들이 늘 현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단일민족의식 속에는 분명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 이미 이 땅에는 50만에 가까운 외국 출신이 살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이주노동자들이다. 19세기 후반 이래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이민길에 오른 동포는 약 500만명.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자신의 태를 묻은 고향은 아니지만, 뼈를 묻어야 할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식이 살아 있는 한 이 땅은 이주노동자들, 짝을 찾지 못한 농촌 노총각들의 아내가 되어준 동남아 여인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발붙일 곳이 못 된다. 다른 인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우리는 모든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지는 않다. 미국인 등 백인종에 대해서 우리는 한수 접고 들어가는 반면, 동남아나 아프리카 출신들, 그리고 같은 황인종인 중국인에 대해서는 못살고 더럽고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이런 편견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에게 보인 편견의 재판인 동시에 인종간에 위계질서를 매기려 한 일제의 인종관의 잔재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이후 일본군국주의가 팽창을 거듭하면서 일본제국의 판도는 만주와 중국 일부를 거쳐 동남아 일대로 확대되었고, 일본제국 내의 인종적 구성도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건설’을 표방한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내세우며 일제는 여러 인종간의 ‘협화’(harmony)를 강조했지만, 이 허울뿐인 협화는 각 인종집단간의 평등에 기초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본인을 정점으로 각 인종집단간에는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했고, 여기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우리 민족은 ‘2등신민’(二等臣民)으로서의 온갖 참담한 ‘혜택’과 저주받은 유산을 떠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조선인들에 대해 ‘동조동근’(同祖同根: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상과 뿌리가 같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허락’하고, ‘황군’에 참가하는 ‘은전’을 베푼 것도 다 ‘2등신민’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의 하나인 일본군 성노예(‘정신대’) 문제 역시 일제가 우리에게 자기 마음대로 부여한 ‘2등신민’의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성적인 노리개로 농락당한 여성들은 적게는 수만명, 많으면 2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80% 이상이 조선여성들이었다. 파렴치한 일제는 ‘차마’ 일등신민인 일본여성들을 잡아다가 그 짓을 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황군’ 병사들한테 ‘열등’한 인종 출신의 ‘질나쁜 성적 노예’를 공급할 수도 없었기에 ‘2등신민’인 우리의 누이들을 마구 끌고 간 것이다. 그렇게 끌려간 우리의 누이들은 ‘닛뽕진또 죠센진와 덴노헤이까 오나지네(일본인과 조선인은 천황폐하가 같지요)’라는 서툰 일본말을 외우며 옷고름을 풀 것을 강요당했다. ‘한겨레’라는 이름의 가치와 한계 우리는 20세기의 전반기에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인종차별의 설움을 쓰리도록 겪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못된 시어미가 되는 것일까? 일제 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과 전쟁에 휩쓸려간 우리나라에 미국식 백인우월주의가 들어오면서 ‘2등신민’ 의식이 살아남았기 때문일까? 쓰라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나 처지가 못한 자에게는 턱없는 우월감을 갖고 인종차별을 전가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기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깔려 있는 인종멸시의 태도는 베트남의 정글에서 재현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일 한국ㆍ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이 땅의 이주노동자 등 피부색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동남아나 중남미로 진출한 한국기업에서는 일제시대 일본인 공장주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가한 민족적 멸시와 학대를 다시 볼 수 있다. 우리의 내면에 터를 잡은 백인우월주의는 어김없이 이민보따리에 묻어 태평양을 건너 본고장으로 역수출되어 한흑갈등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 이웃 일본에도 단일민족의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고, 우리의 단일민족의식은 그런 일본을 상대로 싸우면서 서로 닮아간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 중엽 이래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해온 우리는, 중앙에서 파견되어 임기를 마치면 떠나야 할 관리 대신 봉건 영주가 대를 이어가며 자신의 영지를 다스려온 일본에 비해 민족공동체의 동질화가 더 오랜 기간에 걸쳐 강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단히 강한 민족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전개된 민족사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인종주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보면 이는 불행히도 인종적 편견이 손쉽게 자랄 수 있는 온상이기도 하다. 민족적 동질성이 상당히 강한 사회와 단일민족사회는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이다. 단일민족사회란 사회구성원 중 소수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말살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한 사회이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을 내던져야 함은, 크레파스의 살색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지워버려야 함은, 단지 우리 사회의 인구구성에서 1% 내외에 불과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단일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을 고집할 때 우리는 우리와 다르지만 동등한 인권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는 대열에 어느새 서게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억압적 요소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1988년 이 처음 창간될 때 분단된 조국의 남쪽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리고 6월항쟁의 피땀이 지역감정에 묻혀버리는 것을 본 우리는 이라는 제호를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더디 흐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종래의 과제를 해결하기 전에 새로운 문제를 불쑥불쑥 내던지곤 한다. 단일민족의식의 흔적이 물씬 배어나는 이름을 지닌 와 이 어떤 매체보다도 열심히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고투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피부색 다르다고 왜 이리 못살게 구나.우리는 단일민족의 허상, 혈통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재외동포에 관한 법률을 보면 단일민족을 따지는 기준이 꼭 ‘단군 할아버지’ 자손은 아닌 것 같다. 이 법은 재외동포의 정의를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 및 그들의 자손으로 규정하는 절묘한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민을 떠난 재중동포나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재외동포에서 배제시켜버렸다. 이 몰역사적인 법률은 단일민족에 포함될 수 있는 재외동포의 필요충분조건이 결국 혈연이나 민족의식만으로는 부족하고 ‘돈’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명백히 한민족의 구성원인 중국이나 옛 소련 지역의 동포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단일민족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 또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주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말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여기에 “월급은 왜 안 줘요?” 같은 말들이 실제로 이들이 사용하는 한국어 교재에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일민족국가 한국의 현실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는 불법체류자이다. 이는 우리의 출입국관리법이 그들의 법률 위반을 부추겨 불법체류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불법체류자라 해도 이들의 체류자격이 불법인 것이지 인권과 자존심까지 불법화된 것은 아니다. 8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외국인들의 노동이주가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경제가 이들의 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엄연한 현실에도 출입국관리 당국은 이들에게 잘해야 3개월짜리 체류허가를 내줄 뿐 이들이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의 숫자가 늘면서 이주노동자와 한국인들간의 국제결혼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 들어 국적법이 개정되기는 했으나 90년대 내내 우리 사회는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과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의 결혼에 큰 차별을 두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차별을 받았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은 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1999년까지 한국국적을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취학도 불가능했다. 이 문제는 현재 부모 중 한 사람이 한국국적이면 그 자녀도 당연히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지만, 한국 여성과 결혼한 이주노동자가 한국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의 경우 합법 신분을 갖고 3년 이상 연속적으로 거주한 경우 한국국적의 취득이 가능하지만 3개월짜리 체류허가만 끊어주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3년간 한국에 거주하는 길은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는 전통 때문에 이들을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일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히는 피부색 다른 사람들을 못 살게 굴자는 심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단군’은 한때 민족주의자들의 지혜였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깊어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2세들의 취학 문제이다. 그러나 어느 학교도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 어린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극히 최근에야 성남에서 10여명의 몽골 어린이들의 등교를 허락했지만, 그들은 아직 청강생 신분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학교에 보내면 될 것 아니냐 말하지만, 사립초등학교 학비의 몇배가 넘는 외국인학교 학비를 댈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엇하러 머나먼 이국 땅에서 3D 업종에 종사하겠는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군을 내세워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은 것은 한말-일제 초기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지혜였다. 그들은 남의 땅에서 무기를 들어 군대를 만들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단일민족 담론의 선구자들은 남의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갖은 서러움을 겪어 본 사람들이었다. 피부색과 말이 다르다고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우리의 이지러진 모습은 과연 그들이 꿈꾸던 민족국가의 모습이었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 한 겨레 신문에서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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