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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62 일째

`나당 전쟁`과 대한민국 ( 옮긴 글 )

신라는 천년의 왕국이다. 비록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이 늦었지만, 결국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 어떤 이들은 영토상으로 불완전한 면과 당 세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관점에서 비판을 한다. 하지만, 당시 전제군주국가에서 왕이 곧 국가라고 전제할 때, 이런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수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패배는 자신의 왕권이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적 감정에서 거국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당과 벌인 싸움에 있다. 왜냐하면, 신라의 저주 노선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 신라는 신라 이외의 나라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같은 민족의 국가와의 전쟁이나 당나라와의 전쟁은 신라의 입장에서 같은 맥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볼 나당전쟁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당은 백제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이기자, 백제, 고구려 땅에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지역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또한 663년(문무왕 3)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형식적이나마 신라를 당의 한 도독주로 삼았다. 특히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삼국을 총괄토록 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직후부터 당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에 도읍을 정해줌으로써 고구려 부흥군과 유민들을 대당항쟁에 이용하였다. 670년에 신라군이 당나라와 부여 융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하였고, 671년에는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당군의 침략이 격화되어, 672년 당나라 고간의 대군과 격돌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674년 신라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하고서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675년 당나라 설인귀의 침공을 격파하여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이 이끈 20만 대군을 매초성(양주 일대)에서 크게 격멸하였으며, 676년에는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패퇴시켰다. 결국 신라군에게 대패한 당이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김으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상 두산 백과 사전 참조) 위에서 나당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우리 역사를 통해 자주 국가의 의미에 대해 되새김질 해야 한다. 신라는 비록 당을 이용하여 주변국(같은 민족의 국가인 고구려, 백제)을 정벌했지만, 그 후 당시 최강대국 당의 지배 아래 놓일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강대국 당과 맞써 싸워 이김으로써, 천년의 왕국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1945년 일본으로 부터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후에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즉 진정한 해방이 된 것은 아니다. 어떤이들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가라고 말할 것이다. 맞다. 형식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형식과 실질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당전쟁 당시와 현 대한민국의 사정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것은 나당전쟁 당시 당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현재 최강대국이라는 것이고, 그 미국 세력안에 대한민국이 편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당시 신라에는 자주파들이 득세하였고, 자주 세력들과 백제, 고구려 유민들이 힘을 합쳐, 나당전쟁을 전개해 승리할 수 있었지만, 현 대한민국 안에는 미국의 비호아래 기용된 친일파와 친미파들이 득세하여 국민보다는 미국의 눈치를 더 보고 있으며,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친미적 성향을 보이고 있고, 여론을 조직해 나가는 유력 일간지인 조선일보등이 친일 친미 경향을 보임으로써, 친일, 친미 세력 척결의 여론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당시 신라가 펼쳤던 당과의 전면전을 미국과 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해방전쟁 전략을 세워야 한다. 우선 국내에 친미, 친일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 문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아직도 한겨레에는 친일파 청산 문제(예를 들어 미당 서정주에 대한 논쟁들)에 대해 독자투고를 하는 이들이 꾸준히 있고, 또한 우리 경제문제(매판자본에 의한 경제구조의 왜곡 문제)를 보더라도 이런 친일, 친미파 문제가 끝나지 않았고 지금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친일, 친미파 인물 사전 편찬에 대해 적극지지를 보내는 바이며, 일간지(특히 한겨레)에서 이를 연재하는 방법을 적극 검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내 정치 경제 또 여러 분야에서 이런 친일 친미 세력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 해야 할 첫번째 역사적 임무이다. 그리고 외세의 대표적 상징인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미국도 주한 미군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친미 력의 대표격인 조선일보는 이를 부정한다.). 또한 대외적으로 지금은 국제법이 통용되는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이런 국제법을 이용해야만, 약소국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반미 국가들과의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 이는 소진의 합종책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를 통해 각국은 자유와 자주의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아래 놓여있다. 이런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자주적 국가를 우선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내부적으로 뿌리깊은 친일 친미세력과 대외적으로는 주한미군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간섭아래 놓여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과거 나당전쟁을 방불케 하는 해방전쟁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니리포터 박형진 기자 - 한겨레 신문에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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