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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0 일째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6.25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해서 그래도 공직에 들어와서 성공하여 동장으로 정년퇴임하신 최 광필 동장님.....한문글씨를 꼭 인쇄한것 마냥 멋이있게 쓰셔서 엄청이나 부럽던 그분의필체.지금은 글씨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글씨 못쓴 사람은 좋은부서에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실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애기가 되었군...모든 사무는 우선 본인의 필체에서 출발한것이 정석이엇으니....그 최동장님이 정년퇴임하신지 5년인가 보다....그 외아들이 그렇게 장가간단 소식에 당신이 기뻐서 소리치시던 엊그제..여태껏 장가도 안가고 속만 썩히다가 오랫만에 장가간단 애기를 전에 들었다.그 아들 나이가 35 살이나 되고 보니 안그러겠는가?그 분이 공직생활을 이곳에서 많이 하셨고 연고가 여기라서 이곳으로 잡은 것 같다부천시 심곡동이라고 하시던데.....항상 y 구에서만 원으로 빙빙돌다가 오랫만에 그 공항로를 달렸다...상전 벽해가 이를 두고 한말이던가?桑田碧海.....실감있게 느낄수가 있다...불과 한 10 년전만 해도 여기공항로 변은 벼가 출렁거리는 도심속의 전원풍경을 만끽하곤 했다..그래서 공항에서 시내로 차를 타고 달릴때는 한국의 농촌의 모습을 여기서부터 느낄수 있어서 향수에 젖어있던 내국인이 다시금 우리나라에 왔단 안도감을 느끼곤 하던 곳이 바로 공항로 변이었는데....실로 상전 벽해의 무심한 변화앞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앞선다...어이 해서 서글픔이 드는가?전원풍경들이 그렇게 도시화로 치닫고 있는데 그렇게 낙후된 농촌의 전원풍경을 고수 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담 할말이 없겠지만........예전의 그 풍요롭고 한가롭게 보이던 그런 모습들이 사라진것은 못내 아쉽다..암튼 그 벼들이 출렁이던 논들이 이젠 고층 상가가 어디 강남의 테헤란벨리를 온것같은 착각이 들고 그렇게 능숙히 다니던 곳이 이젠 예전의 건물로 어렴풋이 나마 짐작하는 그런 도시로 변화 되어 버렸다....아~~~ 세월의 무상이여.....그 86...88올림픽때 얼마나 공항로변을 환경정비 한다고 그렇게 설치고 고생하고 그랬던가....우리의 관문이니..그 나라의 얼굴이 바로 공항이니....외국인들이 첫 인상이 남는 곳이 공항이니..공항로를 가꾸는 것은 수도 서울의 얼굴에 화장을 한것 같다느니...긍지를 가져라 그렇게 부추기면서 독려 하던 그 사람들은 이젠 어디에 있을가?그래서 퇴근을 못하고 거리 거리 다님서 페인트 칠하고 때론 빈땅 주인과 싸움도 함서 환경정비를 하여 달라고 애원도 하기도 하였었지...출근후엔 바로 하는 일이 공항로 정비 였다..그 관문이란 명목하에 모든것이 환경정비가 최우선 있었던 시절이었다......그런 한가하고 썰렁하게 텅빈 공항로가 이제는 번화가로 변하여 이곳이 바로 전날 그렇게 벼들이 황금 물결치던 그런 곳이었던가 ....예전의 건물이나 거리가 달라져서 변하였을때 비애가 들기도 한다..그 정다운 모습이 사라진 것 같은 아쉬움에....정다운 얼굴들을 많이도 만났다...10년 혹은 그 이전 사람도....반갑고 옛 향수를 느끼는 것과같은 생각에 감회가 깊다...구청 인사계장하다가 거기로 와서 동장이 된 안 동장...그 카랑 카랑한 성격에 첨엔 불만도 많았지만 그래도 인정이 많앗던 그 안 동장님..머리만 희어졌지 얼굴은 그대로다...세월을 멈춰놓고 사셨나? 그 얼굴 그대로니......그리고 늘 인정이 많고 목동개발당시엔 목동 동장으로 있다가 부구청장과 함께 인질로 잡혀서 린치를 당했어도 원래가 인심을 얻은 분이라 이 박동장님은 그래도 주민들이 풀어주고 석방되어 그때 화제가 되었던 그 박 사길 동장님.....그래서 사람은 어디서나 인심을 얻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곤 했었다다른 동장이 주민들에게 인질로 잡혔으면 아마도 반은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엔...그 성난 철거민의 눈엔 동장 정도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라서 ...그 박사길 동장님은 공직자라고 하기보다는 시골의 친근한 형님과 같은 인상으로 그렇게 부하 직원들의 존경을 받았다..인연이 깊었는지 두번이나 근무했던 인연으로 유달리 가까운 분이었는데...동안 적조 했다......아니 내가 무심한 거지....자주 찾아 뵙고 그래야 하는데....사람이 어디 그런가 ..박 동장님이 현재의 나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기적인 사고가 팽배히 살아 있는데.....그래선 안 된다 하면서도 잘 안되는 것이 이런 분야인것 같다 ...모든 세상이치를 자기와의 이해 관계서 따지고 평가하는 그런 버릇들....건강히 뵈는 인상과 넉넉한 인품이 여전하시다..한달전에 사원 등산대화 갔다가 심장마비로 장남을 잃었단소식을 옆에 계신 이 윤수동장님이 알려 준다그 슬픔은 무어라고 할수 있을가?그 자리에서 무어라고 위로할 말도 잊고 난 그저 바라만 보았다..가장 세상에서 슬픈것이 많다고 해도 육친을 잃은 슬픔보다도 더 큰 슬픔이 있을가난 뭐라고 위로도 못해 드리고 예식이 끝나고 조용한 카페에서 그 박사길 동장님과이 윤수 동장님...그리고 선배였던 한 기찬 씨도 함께 차 한잔 하고 적조된 애기도 나눴다...1986년 2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레를 다 치르고 다시 직장에 복귀했을때...그 박 사실 동장님의 나에 대한 에우....지금도 난 잊혀지지 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각인되게 감동받은 탓인가?사실 동장님은 상가에 갈수 없었다.....사무실을 비고 갈 형편이 아니라서...대신 2 인자인 사무장이 대신 간게 아니던가?그런데도 그 박 사길 동장님은.....-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응당 찾아 뵙고 문안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순간 어안이 벙벙했다...박 동장님은 나보담도 한참이나 연배시고 상사이고 해서 늘 반말이였다..아니 김 주임.....이것은 어찌 된것인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깍둣히 존대말로 그리고 나에게 90도 각도의 깍듯한 인사로 예의를 표시하는 것에 난 당황했다...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몸에 벤 생활이고 기본으로 익힌 예의 였다..그렇게 그분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깍듯이 양반의 기질이 베어 있어 에의가 생활화 된 분이셨고 난 그렇게 항상 점잖고 상식이 갖춰진 그분을 존경했다...이런커피 마심서 대화 한지 얼마만인가?그리고 전에 모셨던 엣 동장님들...나도 시간이 흐르면 저렇게 가야 하는 것이 아닐가?나도 언젠가 아니 얼마지나지 않아서 저 분들같이 저렇게 초라하게 살아야 하는것이 아닌가?어딘가 힘이 없고 어딘가 자신이 없고 어딘가 인생에 대한회의가 드는듯한 얼굴들년말에 보는 얼굴들이라 그런가?쓸쓸해 보인다.....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쓸쓸해 뵈고....- 갑자기 장남을 잃어 버린 박 사길 동장님도 그렇고...- 아들이 주식에 투자하여 집도 팔아야 할 위치라고하는 이 윤수 동장님...왜 퇴임후에 그렇게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럴가?인생의 행복은 그 사람이 인정이 많고 후덕하다고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 보다..그렇게 성실하고 그렇게도 인정이 많은 박 사길 동장님의 그런 불행...늘 깔끔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 이 윤수 동장님의 아들의 주식으로 인한 말년의 그런 불운들...커피 ™Ÿ에서 거의 2 시간이나 대화했어도 아니 난 듣기만 했었다..그렇게 정년퇴임하고 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 이분들...나의 미래의 자화상을 드러다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찮다..그분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겨울 거리는 찬 바람만 불고 사람들은 많아도 어딘가 어두워 보인것은 내 맘이 어둔 탓인가?담담히 걸어보는 발산동의 거리....거리에 부는 바람이 유난히 차다고 느꼈다......공항로엔 아직도 차들의 행렬은 줄을 이어 달리고 있다....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봄은 아직 멀엇는데...내 마음의 봄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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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1 사랑과 고독, 그리고... 6982 독백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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