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62 일째
朴正熙, DJ & 昌
1979년 10월 27일 새벽 중앙청 안의 한 넓은 방. 허우대가 큰 문공장관은 새벽녘 푸르딩딩한 빛을 빨아들여 한층 검게 빛나는 대형 칠판에 ‘박정희대통령 유고(有故)’라고 썼다. 18년 장기집권자의 최후였다. 어느덧 중앙청에서 세종로에 이르는 큰길가에는 라디오 긴급뉴스를 들은 많은 사람들(특히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 많았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임금의 서거(逝去)에 흰옷을 입고 나와 통곡하던 조선인, 바로 그들이었다. 박정희는 임금이었던가? 그랬다. 상당수 한국인들에게 박정희는 배고픔을 잊게 해준 ‘영명한 군주’였다. 한 미국인 기자가 물었다. “당신들은 박정희가 독재자라고 비난해왔다. 그런데 이들은 또 누구인가?” 그는 박정희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적인 인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중성은 지금도 완강하게 존재한다. 헷갈리는 역사의식 1973년 8월 8일. 2년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박정희와 맞섰던 김대중은 일본 도쿄호텔에서 일단의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중앙정보부의 지휘를 받은 것이 확실한 납치범들은 김대중의 몸에 쇠뭉치를 달아 바다에 수장(水葬)하려 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김대중은 닷새 후 서울 동교동 주택가 골목에 풀려났다. 그후 박정권이 끝날 때까지 김대중은 투옥과 연금으로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해야 했다. 1999년 5월 13일. 김대중대통령은 대구에서 “박전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측은 ‘피해자 김대중’의 ‘가해자 박정희’에 대한 용서는 역사적 화해이자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을 위한 ‘위대한 결단’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일방적 논리의 허구성은 제쳐두더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김대중정권의 ‘동진(東進)정책’과 맞물린 정략의 냄새를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9년 8월 27일. ‘장면(張勉)전총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에 참석한 김대통령은 “장면박사는 5·16 군사쿠데타 세력의 세뇌작업으로 오랫동안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면서 5·16세력을 비난했다. 석달 전 ‘역사 속에서 존경받아야 할 지도자’는 다시 비난받아 마땅한 쿠데타세력의 핵심이 된 셈이다. 이쯤되면 DJ의 진정한 역사의식은 과연 무엇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박정희정권 시절 줄곧 판사직에 있었다. 그가 그 시절 나름대로 ‘올곧은 법관’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총재에 대해 ‘도메스틱 베스트(Domestic Best)’라고 평가했다. 한국사회의 주어진 내부여건 하에서 ‘최고’를 지향해온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최고를 단지 권력으로 볼 필요는 없다. 최선을 뜻한다고 보는 편이 보다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 ‘최고 지향’ 속에 역사와 시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적어도 그런 느낌을 준다면 새로운 시대 정치지도자로서의 리더십에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남북문제와 관련한 ‘이회창 딜레마’도 결국 그러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입다문 한나라당 ‘이회창 딜레마’는 최근의 ‘박정희 기념관’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 여당이 200억원이나 되는 국민세금까지 들여 ‘박정희 기념관’을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 옆 공원부지에 세운다고 했는데도 한나라당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 흔하던 대변인 성명서 한 장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입조심 말조심이란다. 대구 경북의 민심을 살펴야 하는 데다 당장 박전대통령의 큰딸인 박근혜(朴槿惠)부총재를 대하기도 껄끄럽기 때문인 듯 싶다. 물론 소속 의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극우보수에서부터 진보에 이르는 한나라당에서 ‘박정희 문제’에 대한 통일된 의견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드시 한 목소리가 나와야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제1야당인 공당이라면, 이회창총재가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라면 적어도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공적인 답변은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한국의 정당이 이념이나 철학이 빈곤한 도당(徒黨)의 측면이 강하다고 해도 역사에 침묵해선 안된다. 그래서는 미래의 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 전 진우 논설위원 : 동아일보의 칼럼에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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