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일째
이런날은 詩를 읽자
바람이 좋은 저녁 - 곽재구 내가 책을 읽는 동안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바람은 내 어깨 위에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마침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누구든지 그 침대에서푹 쉬어갈 수 있지요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그럴 때 나는잠시 허공을 바라보다바람이 좋은 저녁이군,라고 말합니다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내 어깨 위에서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새콩덩굴과 아이) - 오규원엉겅퀴를 지나면명아주를 지나야 하는 길입니다수영을 지나면여뀌를 지나야 하는뱀딸기를 지나면메꽃을 밟아야 하는매듭풀을 들치면갈퀴덩굴을 지나야 하는새콩덩굴이새콩덩굴을 감아야 하는 길입니다방가지똥을 지나면괭이밥을 밟아야 하는잠자리가 문득새콩덩굴을 밟아야 하는한 아이가 문득멈추어야 하는 길입니다 (뜬 구름) - 김용택 구름처럼 심심하게 하루가또간다아득하다이따금 바람이 풀잎을 건들고 지나가지만그냥 바람이다.후딱 지나간 저것이 설마귀신은 아니겄지?유리창에 턱을 괴고 앉아밖을 본다. 산, 구름, 하늘, 호수, 나무운동장 끝에서 창우와 다희가 이마를 마주 대고 흙장난을 하고 있다.호수에 물이 저렇게 가득한데세상이, 세상이이렇게 무의미하다니. 동강 1 - 이하석 궁벽한 삶의 비탈에 추수 끝난 옥수수 대처럼 서서 마른 마음 펄럭인다. 밭뙈기 아래 수척한 그늘이 강물에 비쳐 환하다. 저건 누구의 상처이지? 강가에 흩어진 자갈들이 많이 으깨어져 있다. 큰물 지나간 어수선한 자리. 푸른 수심(水深)의 생각만으로 두리번거리는 사이 상처에 붙인 반창고처럼 풀들 우거진 아픈 자리마다 핀 가을꽃, 눈부시게 수면에 얼굴 비춰본다. 저기, 나를 따로 갓쪽으로만 미는 물, 모든 걸 비추면서 날 적시는 물, 물음같이 울음같이 아픈 물, 그 오래된 동강이 길다랗게 내 몸 감돌아 흐른다. 유서 - 김태동 봄밤 내 마음의 깃털 낮게 날고 싶은 하늘 현기증 같은 내 귀여운 고양이 나는 미치고 싶은 하늘 이거 주검이야 초록 칼에 목 벼히고 싶어 초록 물 뚝, 뚝, 듣는 초록 바다 잠기고 싶어 지수야 그 짓을 하고 우리는 담배를 문다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서 잔다 이게 생이다 자자 자자 아가야 내 좆이 흐려온다 성욕에 찬 물방울 맺혀 뚝, 뚝, 떨어지는 살점들 아까워라 아까워라 나의 어머니 뜨거운 탯줄이여 나는 지금 청아한 새의 울음 들으며...... 참회하는 아름다움이다 물을 베고 참회하는 아름다움으로 물을 껴안고 이건 지옥이야 지옥의 겉창을 열고 새소리 들어 짹, 짹, 짹, 하는 저 소리 '내가 허리띠로 내 목을 끌어야지' 하는 저 소리, 나를 치네 저 모가지 잘라 어둠 속, 피를 뿌려야지 '이건, 지옥이야 이거 지옥이야' 내가 죽는 날은 올까 본능은 어떨까 헌혈은 우리의 건강 진단입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요 참꽃처럼 봄에 피는 꽃, 봄에 죽는 꽃, 왜 죽습니까 내 머리 가로지르는 환시적인 칼, 보입니다 물고기 칼 꽃들 퍼덕여요 유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봄밤이에요 피 흘리고 실어서 어떻게 해 사슴꽃장미나무 이야기 - 박라연 누구 본적이 있으세요 세상을 뚫고 나아가 한 마리 새 되어 날지 못했을 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새 되지 못한 뼈들이 얼기설기 가시가 되거나 철사줄이 되었을 때 가시와 철사줄이 사이 좋게 제 몸의 뼈와 살이 되어주었을 때 한떼의 초록빛 행운들이 가시를 뚫고 철사줄을 뚫고 나비 되어 날아오르던 그 순간을 누구 본 적 있으세요 나비들이 두 뿔을 지나 긴 목을 타고 허리부터 발끝까지 사슴꽃장미나무의 새순으로 제 목숨을 바꾸어 매달던 그 순간을 누구 본 적이 있으세요 안 보이는 길을 걷기 위해 한없이 길어진 다리, 한 그루 사슴꽃장미나무가 된 그녀를 누구 본 적이 있으세요 *산벚나무가 씻어낸다* - 송재학 다 팽개치고 넉장거리로 눕고 싶다면 꽃 핀 산벚나무의 솔개그늘로 가라 빗줄기가 먼저 꽂히겠지만 마음 구부리면 빈틈이 생기리라 어딘들 곱립든 군식구가 없겠니 그곳에도 두 가닥 기차 레일 같은 운명을 종일 햇빛이 달구어 내지 먼저 온 사람은 나무둥치에 파묻혀 편지를 읽는다 풍경(風磬)이 소리내는 건 산벚나무도 속삭일 수 있다네 달빛이나 바람이 도와주지만 올해 더욱 가난해진 산벚나무家 울어라 울어라, 꽃 핀 산벚나무가 씻어내는 아우성 봄비가 준비된 밤이다 *할머니* - 김명인 삼율 지나다가 정거장 건너편, 텃밭이었던 자리, 이젠 누구네 마당가에 저렇게 활짝 핀 봉숭아 몇 포기, 그 옆엔 빨간 토마토가 고추밭 사이로 주렁주렁 익고 있다 왜 내겐 어머니보다 할머니 기억이 많은지, 멍석을 말아내고 참깨를 털면서 흙탕물이 넘쳐나는 못도랑 업고 건네면서 둑방가에 힘겨워 쉬시면서, 어느새 달무리에 들고 그 둘레인 듯 어슴푸레하게, 할머니 아직도 거기 앉아 계셔요? 나는 장수하면서 사는 한 집의 내력이 꼭 슬픔 탓이라고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가 추억이나 향수라는 이름 말고 저 색색의 눈높이로 고향 근처를 지나갈 때 모든 가계는 그 전설 따위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 늘 비어서 쓸쓸하다 ----- 아름 다운 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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