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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일째
섬진강 - 아버님의 마을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 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빛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가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김용택,『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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