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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외로울땐 친구

-잘 있었어? 이젠 선선해 졌으니 한번 만나세 어때?

-그럼 좋지, 헌데 조금만 더 있다 보자 아직은 더워..

학교졸업하곤 갈곳 없었던 시골에선 더 현실에 안주하곤 살고 싶지 않았었다.

신앙촌 살았던 이모할머니가 외할머니 댁에 오셨었을때..

-거기 가면 얼마든지 취직도 되고 돈도 벌면서 살수 있어 오너라.

 

한번도 고향을 떠나서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꿈을 이루기엔 시골은 어떤 전망이 안보여

이종사촌동생과 달려갔던 부천 신앙촌.

이종사촌동생 경제와 완행열차를 타고 영등포 역엔 새벽 4시경 하차.

바로 역앞에서 신앙촌 앞을 지나는 인천행 시외버스를 타곤 곧장 신앙촌행.

40여분 소요되었을까?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 신앙촌 입구.

-여기서 부터 신앙촌 입니다.

안내판 따라 걷던 그 길, 그때 저 멀리 오만제단에서 울려퍼지는 귀에익은 찬송가.

-아, 여기가 내가 꿈을 펼칠수 있는 곳이구나.

이런 야무진 각오로 들어온 곳이었지만 그건 허울뿐였다.

 

친구따라 강남온 경제는 단 이틀을 견디지 못하고 하향해버리고 말았다.

-형 난 여기서 더 이상 못 살거 같아 숨이 막혀 난 갈거야.

-임마 여기까지 와서 더 견뎌봐 더 있으면 좋을거야 남자가 그 정도 못 참아?

같이서 더 있어 보자고 ...

-난 이런곳에서 못 살거 같아 답답해..

갈거야.

 

그해 가을엔 전도사의 소개로 <신앙촌 안내 사무소>취업했다.

낮에는 신앙촌 방문온 사람들을 버스를 타고 곳곳을 다님서 홍보했고

저녁은 갑부와 을부로 나눠 그곳의 경비병으로 근무했다.

약 30명정도의 안내원중에서 우린 젤로 나이가 어렸다.

모두가 30대 초반에서 후반인 사람들 속에 막내로 살았었다.

<안내반 숙소>에서 자야 하고 식사도 해결되었지만...

월급 800 원.

그건 소위 껌 값 정도 였다고 보는게 맞다.

그걸 월급이라고 할수 있었을까...

주의 종으로 사는 우리들은 헌신하는것에 보람을 느낀다.

이런 허울좋은 구호로 노동력을 착취한것 밖엔 설명이 안된다.

 

그때 함께 입사했던 세 사람.

친했던 세사람은 휴일엔 셋이서 같이서 놀았다.

서울외출이 가장 큰 보람이고 휴일.

친구중에 전화온 친구가 <광남>

한살 위지만, 그런것 따지지 않고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데 나 처럼 얼마전에

혈압관계로 쓰러져 사경을 해매다 살아났지만....

말투가 조금 어눌해서 몇번을 물어야 소통이 되는 친구.

<덕소>에 산다.

제2 신앙촌였던 덕소.

50여년전에 만난 인연이지만, 우정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 9월경에 청량리에서 만나서 맛있는거 먹자.

-오케이 그때 보자.

나이가 들어가면 정다운 친구가 더 그립고,보고 싶다.

외롭단 애긴거지.

만나서 50년전의 그 신앙촌 애기로 시간을 보낸다.

2년간의 우정이 이렇게 긴 인연을 맺은것은 아주 특별한 곳에서 맺은 인연였기 때문인가 보다.

그땐 순진해서 세상을 바로 볼수있는 어떤 정보도 얻을수 없었으니..

그래도 2년간 머문 그곳생활.

군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거 같다, 집단 생활을 이미 익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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