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7 일째
유승준, 국가, 나( 퍼온글 )
가수 유승준씨가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분노였다. 한국에 와서 잇속 챙길 만큼 챙기고는 병역의무라는 장벽을 만나자 훌쩍 떠나버리는 그 얌체 같은 짓에 분노부터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청춘 한 때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속된 말로 `박박 기는' 시절을 보내야 했던 대다수 군필자들이 느끼는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일단 치솟은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곧 조금 다른 생각이 뒤따랐다. 혹시 지금 내가 느끼는 분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버린 어떤 국가주의적 정서 때문은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반공도덕과 국민윤리라는 이름으로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했던 그 국가주의적 사고방식,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논리를 앞세우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탓이 아닐까 하는 반성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쏟아진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유승준씨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상당 부분에 이런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개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 성향, 국적 문제와 병역 문제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그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느낀 분노의 기저에 그런 국가주의적 사고 방식보다 더 큰 요인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곧 고등학생이 될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유씨를 둘러싼 논란이 화제에 올랐을 때 아들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왜들 욕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라도 그 처지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거창하게 국가와 민족 운운하는 것까지는 몰라도 아들이 적어도 유씨의 `얌체 같은 짓'에 대해 당연히 비난을 퍼부으리라 생각했던, 그래서 조심스럽게 국가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해주어야지 내심 생각하고 있던 내가 오히려 뜨악해지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내 자신이 느꼈던 분노조차도 기실 내가 그런 처지에 있지 못했던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유씨가 수 년 전부터 `군대 가겠다'는 입장을 밝혀왔고 따라서 이번의 결정이 팬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지적을 논외로 한다면, 유씨를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의 감정 이면에 바로 그런 상대적 박탈감, 나는 할 수 없던 일을 저들은 쉽게 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학적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고위 공직자의 병역 면제율이 17.4%이고 족벌언론 사주 일가의 병역 면제율이 무려 42.1%라는 통계는 그런 상대적 박탈감, 혹은 자학적 분노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근원적인 것은 오래 전부터 `나 혼자만, 우리 가족만 편안하고 안전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고 방식이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리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의 지배 계층이 언제든 그런 삶의 원리를 쉽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반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상대적 박탈감은 모든 사람들이 사실상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충족의 현실적 조건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팽만한 그런 이기적 삶의 원리가 많은 경우 국가주의적 구호와 이데올로기로 포장되며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가장 먼저 군에서 빼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 `반공'을 외쳐대고, 돈 없고 빽 없는 탓에 그러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애국심'을 내세우며 유씨를 비난한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국가주의란 종종, 사회를 지배하는 이기적 생존 원리를 포장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기적 생존 원리를 몸으로 구현하며 사회에 만연시킨 장본인이 다름아니라 틈만 나면 국가 안보와 반공주의를 외쳐대던 이 사회의 이른바 특권층이며 기득권층인 것이다. 김창남/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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