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4 일째
슬픈 물구나무( 퍼온글 )
물구나무가 퍼져간다. 몸과 마음에 두루 좋단다. 딴은 옳은 말이다. 일찍이 물구나무로 열반에 든 선승도 있다. 파격의 깨우침이다. 그 물구나무가 시나브로 `물구나무' 서고 있다. 세태 탓이다. 물구나무 정치인이 부쩍 늘었다. 운동만이 아니다. 늘 거꾸로 서 있다. 16대 국회의원 151명이 탈세로 구속된 언론사주 석방을 요구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곰비임비 풀려났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은 비틀지 말았어야 했다. 석방 건의문은 부르댄다. “구속된 언론사주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언론 본래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온 인물들이다.” 과연 그런가. 사주들이 언론 본래의 사명을 다했다는 주장은, 언론 모독이다. 물구나무는 비단 정가 풍경만은 아니다. `김대중 칼럼'이 책으로 묶였다.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표제가 걸린다. 대문짝만한 두 글자가 표지에 박혀 있다. 직필. 부제는 한술 더뜬다. `기자는 비판한다. 고로 존재한다.' 류근일 주간은 김 주필이 본디 `샘 많은 심통'이니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란다. 하지만 쿠데타에 맞선 민주시민을 난동자로 쓴 기자가 뉘연히 직필을 자랑하는 물구나무를 방관할 순 없다. 그 비판에 변명 또한 김 주필답다. 군의 요구는 `폭도'였단다. 자신은 `난동자'로 썼다고 생색이다. 당시 검열거부 투쟁을 벌인 기자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을 잊은 걸까. 직필 모독이다. 물구나무는 문단에도 도드라진다. 신문권력이 `국민작가'로 칭송한 소설가는 사뭇 `시대와의 불화'를 토로한다. 울적하고 쓸쓸하단다. 지천명을 넘기고도 세상 시비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깊이 빨려들고 있다고 언구럭을 부린다. 조용하고 싶단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또다시 상대의 뺨을 갈긴다. 참으로 연구할 만한 `국민작가'다. 민주운동 단체들을 향해 악령·홍위병 따위의 폭언을 늘어놓고 소설임을 내세운다. 소설 모독이다. 문학에 물구나무 조롱은 더 있다. 쿠데타 주역이 지도자 조건으로 `시심'을 꼽는다. 시인의 여유를 강조한 그는 40년 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러했듯이 여태 색깔공세다. 유권자의 외면을 받자 슬금슬금 지역감정을 다시 부추긴다. 그가 시심을 내세운다. 시 모독이다. 언론·직필·시·소설이 도파니 모욕당하는 오늘 새삼 묻는다. 기자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진실이다. 시대와 맞선 언론인이나 문인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바로 그들이 앞장서 거짓을 참으로 어루꾄다. 여론이 물구나무선 이유다. 이땅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떠나고 싶도록 만드는 `뒤죽박죽 공화국'의 기원은 어디일까. 무딜 대로 무딘 역사의 칼날에 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역사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다. 보라. 일제군복을 입었던 독재자의 기념관이 세워진다. 피땀 밴 국민 세금을 쏟아 붓는다. 부산·마산 민주시민과 젊은 학생들을 탱크로 뭉개려던 박정희가 적잖은 영남인의 우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다. 쿠데타 원흉이 깜냥껏 시심을 읊조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독자에 폭언을 퍼붓는 작가가 독자의 사랑을 강조해도 그만이다. 천하의 곡필도 언죽번죽 직필을 자부한다. 권력의 밀월로 닳을 대로 닳은 언론권력이 비판언론으로 궁딴다.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100년 전 나라가 망한 뒤 여적 온전한 나라를 못 세웠음에도, 어쩌자고 온통 물구나무 서 있는가. 과거를 잊은 겨레에게 역사는 늘 보복하지 않았던가. 슬픈 물구나무 세상을 수련이나 관념으로 바꿀 수는 없다. 문제는 물구나무선 현실에 있다. 되술래 잡는 세상 앞에서 삶은 본디 그런 것이라고 달관한다면,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어디선가 서걱서걱 역사의 칼을 갈지 않는다면, 우리 겨레에 벅벅이 희망은 없다. 오늘의 물구나무가 슬플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손석춘/ 한겨레 신문 여론매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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