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1 일째
건 강 론
사람이 죽는 날까지 건강을 유지 하다가 죽게 된다면 그건 행복이고 타고난 복중에 가장 큰 복일거다.-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는거다.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내가 이렇게 신경질에 가깝게 건강의 중요성을 쌍지팡일 들고서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본 사람만이 건강의 중요성을 알고 배를 고파본 사람만이 가난한것이 뭣인지를 안다.진리일 거다.1977 년 1 월 경이 던가?난 그때 삶과 죽음의 분수령을 넘나 들었다.그때 시골에서 올라온 형님의 신속하고 재치있는 조치가 없었던들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글을 쓸수나 있었을가?< 결핵성 뇌막염 >그런 병이 있단 것도 입원하고서야 알았었다.건강에 대한 무지 였는지 몰라도 난 그런 병명을 첨으로 들었다.결핵균이 뇌에 침투하여 발병한 병..그런 결핵균이 페에 침투하면 잘 아는 페결핵이 되는 것이고..며칠동안을 병원을 전전하면서 감기 증상인줄 알고 약이나 먹고 주사 맞 고 그랬지만 심상치가 않았다.후암동 정금이 누나가 전화를 했었지내가 심상치 않다는 전활 한거지 그런 전화를 받고선 불야 불야 올라온 형님의 놀라움.내가 완전히 의식불명의 상태 였던가 보았다.날이 새기가 바쁘게 병원으로 직행 했지그 금화 아파트의 난간과 택시 타기 위한 몸부림을 치면서..거의 의식이 불명이었던가 보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병은 상당한 중증이었다고 한다좀만 늦었어도 그 균이 침투하여 위험할 뻔하였다고 한다..그리고 헛소리를 하고 병실에서 시트에다 실례를 하기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멀쩡한 내가 그런 지경으로 변하고 보니 형님은 깜짝 놀랐나 보다.3 주 정도 입원했었나?적십자 병원은 역시 유능한 의사들이 많은가 보다그리고 정확히 그 병명을 밝혀내고 그에 맞는 집중적인 투약으로 난 매일 매일 좋아 졌다.- 정금이 누나는 바로 친누나 같이 매일 면회 오다시피했다보름달 빵과 속에 달콤한 꿀이 든 작은 송편떡...그걸 내가 좋아 한줄 알고 올때 마다 갖고 오셨다.3 주후에 퇴원을 했지만 그 뒤에도 한 3 개월 정도는 매일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그 호전되가는 상황을 체크하곤 했다.그리고 긴 시일인 2 년동안을 매일 먹은 약..그 결핵균은 2 년동안은 지속적으로 먹어야 완치가 된다는 의사의 말지겨웠다.약도 많은 데다 그 약은 위를 상하게 하는 약이니깐...속이 쓰렸다건강의 중요성을 그렇게 느껴보기도 그때가 아마도 절실한 때였을거다남보다도 못한 허약체...늘 평범에서 뒤 떨어지고 마는 그런 열등감..내 마음은 건강이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 할수 없다는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게 자리잡게 되었다넘도 평범한 진실을 첨으로 깨달았다 할수 있을가?1 년동안의 직장 휴직은 내 승진에 두고 두고 악재로 작용했다건강하지 못하니 승진에서도 늘 뒤가 쳐지곤 했다그런 부 작용이 있을 줄이야...그래도 일찍 그런 시련을 당한 뒤가 더 나은 인생이 되엇다그런 경험 탓에 누구 보담도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주의 하고 있으니깐 얼마나 다행인가?나이 들어서 그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하면 그때는 늦는 것을...그 병으로 인하여 거의 2년동안이란 기나긴 세월을 완치에 난 총력을 다했고 모든것을 건강을 회복하는데 첫째로 순위를 정했다.공직에 몸담고 있다가 낙항하여 부모님 곁에 머문 그날들그래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부모님을 가까이 뫼시고 살앗던 것은 아닌가?그 날의 일기를 가끔 펼쳐 본다고독과 빨리 회복이 안된 그런 상황못난 자식으로 되돌아와 부모님 곁에서 실망을 주는 나결혼도 못하고 그렇게 머문단 것이 어디 자랑이란 말인지?내 모멸감과 한 없이 초라해져가는 나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그래도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그런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난 누구 보담도 건강의 중요성을 먼저 깨닫고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가....1977 년도의 나의 인생...그 1 년은 나의 그림은 회색빛의 우울한 색갈이 밝아질줄 모르는 우울의 계절이었다.악몽 같은 그런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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