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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1 일째

40 대기수론

3 김 시대가 티브이에서 방영되었다.우리 현대사의 정치를 애기 할때는 뺄수 없는 그 주인공인 3 김씨..40 대 기수론을 펼쳐서 인기몰이하던 3김씨...그 중에 두 김씨의 공적이 크다할수 있다김 종필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40 년동안을 권력의 단맛을 철저히 본 인물이고 1980 년대에 잠간 그 정치적인 행보가 어려웠던 시절을 빼곤 김 종필의 고난한 시절은 거의 없었기 땜이다.김 대중과 김 영삼...그들은 박 정희 정권이 철권 정치를 휘두르던 시절에 그 유신정권과 맞싸워서 과감히 투쟁한 민주화 투쟁의 수호신같은 존재들이 었다그때 40 대 기수론은 여기에 이 철승도 포함이 되었었다그러나 이 철승은 박정권의 유신 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적당히 정치를 하잔 < 중도 통합론 >을 주장한 탓에 그는 거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그는 두 김씨와는 전혀 색갈이 다른 선명 야당의 기치아래 모인 사람은 못 되었다.그가 신민당 당수로 있을적에 보다 선명한 야당투쟁을 했더라면 그는 두 김씨와 함께 영웅적인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끼었을 지도 모른다허나 그는...박 정권의 서슬 퍼런 권력앞에 숨죽여서 편안히 정치를 할려고 했다중도 통합론...그럴듯한 애기다.강과 온을 합쳐서 통합한 형태의 그런 권력..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의 형태..그 당시는...두 김씨가 아니면 감히 박 정권의 권력에 저항할수 없었다.1971년도 신민당 대통령 지명전...그 이전에 유진산 당수는 자기가 대통령 지명을 한다면 당수를 기꺼이 내 놓겠다고 했었지.그리고 그는 바로 자기와 친한 김 영삼을 대통령 지명자로 선출했다당수가 지명한 대통령 입후보자..물론 대의원의 투표가 있었지만...물어 보나 마나한 결과라고 할수 있었지당수가 이미 지명한 상태였기 땜이다.대의원투표를 앞두고 바닥을 흝은 김 대중와 다르게 김 영삼은 느긋하게도 자기가 대통령의 입후보자가 될거란 기대감으로 당수 와 대권 후보..이미 수락연설문을 만들어 놓고 그 연설을할려고 했다.이미 이긴 게임이란 생각...대의원 투표한날40대 기수론을 주창한 3 명은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당수 도전...김 영삼 과 김 대중 그리고 이 철승은 누구도 과반수에 못 미쳤다.그래서 마지막 두명인 김 영삼과 김 대중은 결전 투표에 임한다그 임하기 전에 설득의 명수 김 대중은 이 철승을 설득한다.그의 명함에 당수를 주겠단 약속을 하고..그리하여 케스팅 보트를 쥔 이 철승계는 김 대중을 민다예상을 뒤 덮고 김 영삼은 대통령 지명선거에서 패배한다- 야당 사상 유례가 없는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대통령 후보 투표..이렇게 애기한단다.그 이후에 경선에 도전하고 패배했을적에 우리들의 정치인들은 어디 순응했던가?- 게임이 불공정했다.- 흑색선전이 있었다 느니 하면서 굴복하지 않고 독자 출마한 행태를 보이지 않았던가?바로 1971년도에 두 김씨는 그렇게 패어 풀레이를 해서 아름답게 경선에 도전했는데....-우리 김 대중 동지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 난 첩첩 산중이건 어디 섬이건 발로 열심히 뛰어 김 대중씨를 밀겠습니다..이런 유세 지원했던 김 영삼은 그 때 까지만 해도 멋이있었던 40 대 기수론자 였다..박정희의 부정 선거로 해서 겨우 95 만표로 지긴 했지만 김 대중은 그런 박정희와 싸워서 이 정도 진 게임은 이긴 것으로 알았다.사실 오늘날에 지역 감정은 박 정희가 경상도 지방인의 정서를 자극하여 만든것이 아니고 무언가?- 우리 경상도 대통령을 전라도에서 가져갈려고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이런 망발을 공공연하게 애기한 이 효상...- 호남인이여 뭉치자...똘 똘 뭉치자..이런 포스터를 경상도 곳곳에 붙인 박 정희 수하의 치졸한 숫법..이것은 그 전만해도 호감을 느끼던 김 대중을 밀어 줘선 안되겠단 생각을 한것은 경상도 사람들이었지...지역 정서...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호남서도 서서히 그런 지역 감정이 먹혀 들어가고..투표 결과는 영남이 그 지역감정이 훨씬 심한 차였다호남에선 김 대중이 65%정도가 나왔고 경상도에선 박 정희가 78%의 몰표가 나왔다.박 정희는 그런 망국적인 발언과 지역정서에 호소하여 그의 당선을 철저히게 이용했다 오늘 날의 그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만든 것은 박 정희였다.- 그 당시의 투표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빼곤 서울등 수도권에서는 김대중이가 골고루 더 나왔다.- 경상도에선 박 정희가 무려 100 만표 이상 의 압도적인 표를 더 얻었다...거기서 당락은 결정이 된것이 아니고 뭔가?이런 애기를 당시의 사람들이 증언한다.1971 년도에 박정희는 김 대중이란 젊은 사람에게 혼나고선 직접선거를 해선 질거란 불안감에 월남 패망을 기회로 영구 집권을 위한 < 유신 헌법>을 만들고 군사 독재의 칼을 휘두른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못하면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는 총통재를 만들것입니다...김 대중의 이런 예단...영락없이 맞아 떨어졌다그는 다음해인 1972 년도 10월에 그 악명 높은 유신 헌법이란 법을 만들어 영구 집권을 꿈꾸어 왔으니깐....그리고 그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깡그리 짓 밟아 버렸으니..-한국적인 민주주의..왜 그런 망령을 만들어 한나라를 주물러도 누가 한 마디 못하고 그랫을가?왜 한국인들은 그런 철권정치에 숨죽여서 있었던가?오늘의 말을 하는 사람들그 박정희의 철권통치 시절에 과연 어디서 어떤 일을 했던가?묻고 싶다.그 시절에 뭣을 했는지?오늘 날의 김 대중을 질타하는 목소리를 크게 낸 이 회창이는 그땐 혹시나 그 권력의 단물앞에 편안히 있었던것은 아닌지?그리고 김 영삼 전대통령의 y.h여공 농성사건..신민당 당수 제명과 총제직무 정지 가처분 사건.그리고 부마사태와 유신의 심장에 야수의 심정으로 총을 쐈다는 김 재규이런 역사의 소용돌이는 두 김씨가 없었으면 어디 가능이나 했는가?누가 감히 그런 어려운 힘든 쌈을 했겠는가?아무리 과대 평가해도 그 당시의 두 김씨는 한국정치의 희망이었고 그런탓에 그 분들의 영향력은 대단했었지...박 정권이 죽고서 1980 년 봄...그것도 잠시...권력의 공백을 틈탄 사이에 전두환은 선배 박정희의 아류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광주 시민을 볼모로 그는 권력을 잡아갔다.- 누가 민주화 투쟁을 해 놓으니깐 엉뚱한 육군 소장이 권력을 쥐었다.그 혼란을 틈타서...그리고 광주의 애국시민들을 엄청나게 피를 뿌리게 하고 그 위에 더러운 정권을 만든 전 두환...그렇게 아무런 죄도 없는 광주 시민들이 도륙을 당해도 속수 무책으로 입을 다물던 신문들..조선이니 동아니 중앙이니 아니 한국이니...어떤 신문도 신군부의 그런 악행을 보도 한줄내지 못했다.입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것이다조선일보의 그 유명한 김 대중 주필등은 그 당시에 어떤 논조의 글을 썼던가?혹시나? 전두환 소장을 미화하는데 앞장선 글을 쓴것은 아닌지?- 황강에서 북악까지 ....이런 전두환 전기를 쓴 천금성 같은 이름없는 작가같은 짓은 안했는지?묻고 싶다.그 당시에도 기자였고 그런 글을 써야 하는 사명감은 어디로 갔는지?왜 불의 앞에 그런 악랄한 군인들의 살륙앞에 침묵을 지키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묘사하고 그랬는지?- 왜 광주 시민들이 군인들의 무자비한 총과 군화발앞에 무참히 살해되도 그렇게 보고만 있었던 것인지?그런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의 총이무서워 그랬는가?솔직히 입에 풀칠하는 것이 더 관심사 엿기에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았다고...그러면 담에라도 참회록을 썼어야 하지 않을가?엄청난 자유를 구가하면서도 불만을 독재자 운운하는 사람들..왜 그런 시절엔 그렇게 입도 뻥긋 못하고 있었던지?그러고도 정론을 폈다고 감히 말을 하는가?이 따가운 햇살아래 민족지 였느니 독립운동을 고취했다고 감히 말을 하는가?독재와 싸운 유일한 민족신문이라고 말을 할것인가?- 한국민주화 투쟁에 햇불같은 두 김씨......아무리 강조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더욱 빛이 나는 것은 아닌가?정치를 못했다고 해도 그 당시의 민주화 투쟁과는 별개의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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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91 사랑과 고독, 그리고... 6983 독백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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