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3 일째
부치지 않은 편지(퍼온시)
고은 어느 누구의 권세 한 오리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숱한 생멸 속에서 지난 세월 한 번도 거를 줄 모르고 꽃들은 절로 피었습니다 내 잠든 어리석음도 함께 흩뿌린 노랫소리 개나리꽃들이었습니다 그런 노래 저만치서 벙어리같이 벙어리같이 백목련꽃들이었습니다 여름이 왔습니다 뻐꾸기소리 날 저물어 모든 빈 곳의 말없는 결핍을 채워주었습니다 지난 세월 해마다 어김없이 와야 하는 겨울이었습니다 추운 나뭇가지 밑은 손님처럼 조심스러웠습니다 다른 흔들림에 맞춰 흔들리는 떡갈나무 가지들의 이웃이었습니다 아가위나무 가지 끝 장구채 우듬지들이 공중으로 설장구치며 뛰어다녔습니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어떤 기억인가 이 세상은 조금도 쉬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십 년 고향과 몇십 년 타향이었습니다 누가 물어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떠도는 것이 아니면 그래서 떠도는 자의 노래가 아니면 끝내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도리어 고아 같은 산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윽고 배 한 척 없이 바다에 이르러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나의 무능이 나의 자유였습니다 오 수많은 이야기 속에 사람들의 길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누가 치지 않은 종일지라도 어느 전생 종소리가 돌아와 상기 은은히 새로 울리고 있었습니다 먼 마을들이 한층 더 가까이 와 두런거렸습니다 울음을 꾹 참았습니다 수많은 오름들이 반짝이는 물살로 여울져 갈 때 다만 일자무식의 울음 참고 흐득흐득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무상이란 이 세상의 온갖 애착이었습니다 애착의 착각이었습니다 저 세상조차도 이 세상이 만든 애절한 허깨비였습니다 갖가지 흥망성쇠들이 갖가지 곡절들이 아직껏 오고가는 철새들이 무상이기는커녕 항상이었습니다 가령 나의 어머니는 85세의 여름에 아들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제삿날 밤은 어떤 패설도 욕설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신령이 와 있는지 인기척으로 촛불이 흔들렸습니다 한밤중 제사는 끝내 나의 제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로 둘의 역할 다음날 지붕에는 기러기 똥이 떨어져 있었으며 문 밖으로는 세상의 여러 곳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 세월 30년 이상 많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깃발들이 휘날리며 찢어졌고 빨래들이 빨랫줄에서 날아가기도 하였습니다 분노는 땅이었고 고통은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나 역시 바람 없이 살 수 없었으며 바람은 나 없이 바람일 수 없었습니다 극단에의 도취 그것으로 지난 세월 눈보라치는 날이 가장 황홀경이었습니다 겨울 시베리아가 내 본적지였습니다 때로는 눈 덮인 광야 올 데 갈 데 없는 굶주린 짐승들의 절망인가 하면 때로는 보리밭이 묵묵하게 눈 덮여 청청하였습니다 아직껏 몽고반이 지워지지 않는 아이들이 날리던 연 하나가 하늘 속으로 날아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모자랄 때와 사람들이 긴 꿈을 꿀 때 신들이 두세두세 있었습니다 봄은 결코 반복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남몰래 동백꽃 피는 시간이었습니다 오 한 마디 말에 담긴 몇천 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친구가 저 하얀 춤소매 같은 미지로부터 걸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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