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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4 일째

저물무렵( 퍼온시 )

- 안도현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 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 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애는 날이 갈 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번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애의 여린 숨소리를 열 몇살 열 몇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일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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