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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3 일째

역사와 마주해 보라 (퍼온글)

“반 세기를 넘긴 뒤에 나치 부역 행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자가 물었다. 재판정에 서게 된 피고의 이름은 모리스 파퐁. 나이 아흔살에 가까웠고 드골 정권 때 파리 경찰국장과 예산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전후 콜라보(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있었음에도, 어린이들이 포함된 유대인들을 죽음의 열차로 보낸 과거 행적을 50년 동안 숨길 수 있었던 그는 기어이 한 역사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인간적으론 안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질문을 받은 중학생이 이렇게 답했다. 그 중학생의 말대로 파퐁은 역사를 위해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아흔두 살 나이를 감옥에서 보내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역사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이기도 하다. 그 점을 프랑스의 학생들은 학교에서도 배우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거듭 확인하고 스스로 마음 속에 각인시킬 것이다.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요구하는 사회 환경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신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제법 알고 있었던 나도 최근호를 보고는 그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카프카는 일찍이 `거짓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지금 “천황 폐하의 황은에 감읍”했던 와 가 민족 앞에 사죄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민족지'임을 서로 다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로선 과거 그 신문들의 반민족 행위가 더 놀라운 것인지 오늘의 `민족지'라는 말이 더 놀라운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내가 배운 상식은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과거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지 않은 신문이 `민족지'라고 말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곧 그 신문이 지금 반민족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용인하는 것이 된다고 말한다. 내 상식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동아일보보다 더 적극적으로 배족 행위를 저질렀으면서도 동아일보에 비해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 조선일보가 지금도 민족의 이익보다는 미국을 추종하는 논조를 더욱 분명히 보이고 있다. 역사를 깔보는 시대임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만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과 망언에 대한 일회성 분노 표시로 환원시킨 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이 수백년 지속될 줄 알았다”는 말로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변을 대신했던 시인에게 훈장을 추서하며, 한 젊은 교수는 원로 미술인의 친일 행각을 밝혔다는 것이 괘씸죄에 걸려 학교에서 쫓겨나야 하며, 나랏돈으로 박정희 기념관을 짓는다고 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기는커녕 사죄도 반성도 없이 오히려 오만과 뻔뻔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에게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갖기를 기대하기는 그른 일이다. 어른들은 이미 자조와 냉소 분위기에 젖어 있는데 앞으로 자라날 어린이들은 무엇을 보면서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가질 것인가. 의식과 일상 속에서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로 왜곡된 역사의 기간은 너무 길었는지 모른다. 가령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남아 있었던 기자 정신이 지금은 죽어 없어진 듯하다. 역사를 외경하지 않는 민족에겐 장래가 없다. 나침판이 없는 것과 같기 떼문이다. 또 지식인이든 문인이든 정치인이든 그 누구든 역사와 대면하지 않으면 보잘 것 없는 인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은 지금 민족 운명의 중대한 갈림김에서 긴 역사와 대면하고 있는가, 아니면 짧은 권력과 대면하고 있는가. - 한겨레 신문칼럼에서 ( 홍세화의빨간 신호등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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