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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1 일째

언론개혁 이래서 필요하다(퍼온글)

우리 언론에 문제가 있고 언론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언론문제가 이렇게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것은 그 동안 `권력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즉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지배가 주로 물리적인 억압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날 권력의 지배는 주로 `이데올로기적 설득'이라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군사독재가 물러간 오늘날에도 `색깔론'과 `지역감정'이라는 한국 수구세력의 칼날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한국정치문화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이 두 가지 망국적 요소를 보존, 유지, 재생산하는 것이 바로 언론권력이다. 이 사실이 이제 시민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프랑스의 와 독일의 가 40만 부를 발행하는데, 이 두 나라 인구의 절반 밖에 안 되는 대한민국에 200만 부 짜리 신문이 세 개나 존재한다. 그리고 신문시장의 70%를 점하는 이 세 신문이 똑같은 논조로, 똑같은 정당을 경쟁적으로 지지한다. 그런데 우리 시민의 70%가 그 정당을 지지한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언론이 시민들의 정치적 지향성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 신문사 사주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좌우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진정으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편집권을 장악한 사주다. 언론은 물론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합리적으로 근거지어진 견해를 제시하고, 이를 사회적 상식으로 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언론의 임무다. 그런데 우리 언론들은 당 기관지 뺨칠 정도로 뻔뻔하게 당파적이다. 정치게임의 룰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특정 정당의 기관지가 되어 정치게임의 훈수를 두고 앉았다. 정치적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앞장서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가령 최근에 있었던 황태연씨 사건. 이거, 언론에서 만들어낸 순수 창작품이다. 격조 있는 논조를 유지하면서 2백만의 독자를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센세이셔널리즘에 호소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언론엔 무책임한 추측성 보도, 근거 없는 음모론이 난무하게 된다. 또 대중의 눈을 잡아끌려면 아무래도 이성이 아니라 본능과 감성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문의 사설이 섹시한 제목을 달게 된다. “간첩이 삿대질하는 공안”(조선일보),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는데…”(동아일보). 또 우리 신문에 툭하면 등장하는 “민심”이라는 말. 이 말은 기자들이 대중의 원시본능을 자극하려고 길바닥에 떠도는 감정적인 얘기들을 아무 여과 없이 받아 적을 때 즐겨 사용하는 장치이다. 우리 사회의 여론의 수준은 장바닥에서 떠도는 세론의 수준과 다르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의 언론수준은 아시아에서도 최하위, 베트남보다 바로 위라고 한다. 독재정권 아래서 의식 있는 언론인들은 다 쫓겨나고 어용들만 질기게 살아 남아, 독재에 복무하던 그 낡은 방식으로 싱싱한 젊은 기자들까지 자기들 형상대로 찍어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 언론은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견해를 사회상식으로 등록시키는 공론의 장이 아니다. 더러운 권력욕에 따라 사회적 소통을 마구 왜곡하는 리바이어던이다. 이 리바이어던의 교만한 행태를 바로잡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등 우리 사회의 왜곡된 사회적 소통구조를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론은 개혁되어야 한다. 진중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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