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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권하는 사회 ( 옮긴글 )
〈김성기·현대사상 주간〉“이민, 어떻게 생각해” “글쎄, 이민은 아무나 하나” “아냐, 이제는 심각하게 고려해 볼 만해”. 오랜만에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인다. 안주는 당연히(?) ‘어렵다’는 주제다. 이민 이야기가 나온다. 어차피 미래 전망도 불투명한 마당에 모종의 탈출구를 찾자는 말이다. 좀 여유있는 친구는 “정말 아이만은 우리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며 열변을 토했다. “문제는 돈이야”라는 지적에 분위기는 일순간 가라앉았지만 명색이 친구지간에 이민을 권한다는 게 뭔가 어색했다.지난 몇년 사이에 이민이 부쩍 늘고 있다고 한다. 국경 없는 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나라 안팎의 교류가 많아지는 오늘이다. 차범근과 박찬호가 나갔었기에 히딩크와 우즈가 왔듯이 그렇게 오가는 세계다. 이제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공직자의 이중국적 문제가 논란이 되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중이 아니라 삼중, 사중이면 어떤가. 중요한 건 능력이다. 게다가 현대인의 존재는 어느 면에서 떠도는 유목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고로, 이민이란 것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현대적 삶의 추이를 반영하는 퍽 자연스런 현상이다.문제는 오늘의 이민현상에는 뭔가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민을 결행하도록 하는 모종의 압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이 땅을 탈출하려는’ 일종의 엑소더스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계화 운운하며 바라만 볼 수 없는 문제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민은 사회 성원 개개인의 자유선택 사항이지만 오늘처럼 ‘이민 권하는 사회’에 이르게 된 맥락만은 직시하자는 말이다.왜 떠나려고 생각하며 또 실제 떠나고 있는가. 이 땅에 산다는 게 무척 피곤하다고 한다. 그냥 힘들다는 게 아니라 피곤하다는 말에 유의하자.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저런 규제가 너무 많다, 제대로 기업하기가 어렵다, 우물안 사회를 벗어나 세계 무대로 진출하고 싶다 등의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이면에 놓인 핵심은 ‘정이 안 든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참 애매한 논리일 뿐더러 그간 이 땅에서 파란의 생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에게는 그야말로 해괴한 발상법으로 비칠 수 있으리라.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며, 바로 이로부터 ‘이민을 통한’ 엑소더스의 욕망이 발원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민현상은 직장, 친족, 학교 등으로 이루어진 저간 삶의 거푸집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 거푸집이 정확히 ‘우리 사회’인 것인데, 거기에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인생이 망가지는 것 같다, 별 다른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결과야 어떻든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땅에서의 새 출발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그럼, 이같은 ‘사회적 부적격자’를 양산하는 우리 사회란 대체 어떤 사회인가. 오늘의 ‘이민 권하는 사회’를 향한 이 물음에 소득 1만달러 시대의 비극적 자화상이 아로새겨있다. 사회 성원에게 쉼 없는 경쟁의 압박을 가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가는, 그리하여 거친 삶의 논리에 시달리다 지쳐 끝내 삶의 터전을 스스로 포기하게 한다는 것. 그래, 나는 이민을 떠나는 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무언의 메시지를 읽는다. ‘우리들은 적자생존의 화신(化身)이다, 문화 이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지금 이 순간에도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이민 행렬은 줄을 잇고 있으리라. 대개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남길 것이다. 그 의례적인 표현 중 ‘시원하다’는 말만 들리는 건 나만의 편협한 생각 탓일까. 나는 무엇보다 국회의원들이 그 출국 현장을 자주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이 가볍도록 이민절차를 간소화해주고 또 이민 대상국의 정보를 지금처럼 개인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정부차원에서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그게 이민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어야 마땅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싶다. - 경향신문 칼럼에서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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