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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19세기 조선인 삶

어젠 유튜브에서 19세기 조선인의 삶의 모습을 봤다.

그 당시면 지금부터 약 150 년전의 생활상이라 그리 먼 애긴 아닌데..

놀라워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풍요롭게 잘 먹고 좋은 시설에서 살았던 왕의 평균 수명이 41세.

유일하게 영조만이 81세까지 장수를 누렸을뿐..거의 모든왕들이 60을 넘기기 힘들었다

한다

그럼 민초들은 29세가 평균수명이란다.

청년되자 마자 죽어야 했으니 이게 과연 살았던 것이였나? 

조혼이 성행한것도 이런 단명한 수명 때문이 아닌가 한다.

죽기전에, 후손을 남겨야 하는 거룩한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그런 조선인의 생활상을 프랑스 선교원들이 마치 정보원 처럼 확인해서 비밀리에 프랑스에

매일 매일 보고한 내용을 확인한 것이라 신뢰가 가기도 한다.

가장 살기좋은 조건의 당시의 한양 서울의 집 모습은  초가지붕으로 얽혀 위에서 보면

버섯 모양으로 움막집이 대 부분이고, 기와집은 사대부들의 집일뿐...

일반 서민들은 비참한 생활상 그대로 였다.

 

왕이나 사대부 집안에서 병이 나면 의사가 왕진해서 진료를 했지만...

민초들이 전염병을 앓으면 거적에 말아 성 밖으로 내 몰았다고 하니 당시의 조선의 왕들은

이런삶을 알고도 모른척했던것일까?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각종 세금.

징집을 면하기 위해 부과하는 병역세가 죽은 자에게도 부과되었다고 하니 그 정도면

이미 국가는 존재자체가 없은 것과 다름이 없다.

왜?

왕들은 한결같이 그렇게도 무능하고 서민의 삶을 시찰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 비참한 생활을 매일 매일 자기나라에 보고한 이 땅에 몰래 숨어든 선교사들.

 

서민들은, 더욱 여자들의 생활은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존여비의 뿌리깊은 유교사상은 , 여성은 노동과 출산을 하는 도구일뿐..

인권은 없었던 것인거 같다.

 

개방의 문을 꼭 닫고 오직 중국의 정책만을 최고인양 숭배만 했던 사대부와 왕.

그 당시 이미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다 받아 들이고 개화의 길로 달리고 있는데

상투틀고 앉아서 <양반>타령만 하고 있었으니 어찌 발전을 할수 있었으랴..

 

바로 일본의 개화문명을 받아들여 개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우정국거사를 모의했던

김 옥균과 홍 영식과 박 영효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지 못한것 너무 급진적인 개화,국제 정세에 어둔점등이 실패의 원인

 

바로 옆나라 일본인들은 일찍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점점 개방과 개혁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데 상투나 틀고 갓이나 쓴  거추장 스런 조선복을  입고 활보 했으니..

호시탐탐 노리는 청과 일의 밥이 되기 좋았다.

1910년의 조선의 패망은 우선 왕의 무능과 주위를 감싼 신하들의 정세판단을 못했던

것들이 크다.

오죽했음 이 완용 같은 매국노가 한일합방을 공공연히 외쳤을까?

그때나 지금이나,상황은 다르지 않을거 같다.

강한 우리가 되어야만한다.

어제의 역사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의 교과서 같은것 같다.

아픈 뼈아픈 역사는 되풀이 하지 않기위해 역사를 똑 바로 보아야 한다.

불과 150년전의 조선사회상.

산다는 것이 절망과 고통였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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