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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고향 형님

까치산에서 운동중 알게된 고향 형님 <정>

3년전 허리 수술후유증 때문에 운동도 못하곤 가까운 공원이나 거닐고

헬스장에서 가벼운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분.

-자네도 절대로 허리수술은 하지 말어

가벼운 마음으로 했더니 재발하곤 잘 낫지도 않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2번이나 수술을 했으나 완쾌는 커녕 항상 힘들게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다.

-난 정말 두 발로 자유롭게 걷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수 없어

나처럼 당해보면 다 알지.

 

지난번 아들 결혼식때, 어떻게 소문듣곤 축의금을 보내줘 식사약속해

저녁을 했다.

-내가 젊은 시절엔 양복점이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몰라.

나주에서 양복점을 하니까 처갓집에서 딸을 억지로 결혼을 시킨거나 다름없어

당시 처갓집이 그래도 부자여서 결혼지참금이 쌀 100석이나  갖고 왔어

그게 더 크게 양복점을 확장시킨 자본이 된거야

시골에서 쌀 부자면 부자아냐?

내가 좋은게 아니라 내 직업이 퍽 유망스러워 장인이 작업(?)한 것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의 직업이 좋으면 여자들이 줄을 서는거

다 같아.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해 당시의 양복점의 로망인 서린동에서 유명양복점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자랑을 만나면 하곤 한다.

그 시절에선 그 보다 더 멋진 직업이 없었으니...하다보면 끝이 없다.

누구든 자신의 화려한 과거를 애기할땐 좀 과장을 하는거라 이해한다.

총각시절부터 40여년을 그 직을 했으니 그 명성을 알거 같다.

북가좌동의 <한샘 양복점>의 고 사장.

늘씬하게 다려진 양복을 입고 기름발라 빗어넘긴 헤어스타일이며,

자신의 멋진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고 재춘 >사장.

지금도 멋진 모습으로 노후를 즐기겠지?

70년대의 남자의 직업에서 재단사는 단연 인기직업군의 하나.

멋 부리고 돈 잘 버는 직업.

그 많던 양복점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형님은 3살 연상인지라 늘 형님이란 호칭을 붙인다.

정많고 다정하고, 자상한 좋은 분이라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은

만나서 식사는 하는게 자연스럽다.

딸 셋만 낳아 모두 출가시키곤 딸들의 효도를 받으며 노후를 편히

지내지만, 그 허리때문에 얼굴엔 근심의 주름이 가시질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모든것을 주진 않는다는 법칙.

-아픈건 다 자연스런 현상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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