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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아, 형님

11시경 형님을 실은 운구차가 땅바치 장지에 도착한걸 보고 집을 나섰다.

쌀쌀한 어제날씨에 비해 퍽 포근한게 마치 초봄인듯하다.

매일 당신의 배나무가 심어진 과수원 한 귀퉁이.

이미 당신이 묻힐 장소를 유언을 해 두셨단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가 나란히 묻힌 바로 아래에 당신은 묻히셨다.

신작로에서 장지까지 관을 운구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배웅하고 싶어 자진하여 운구행렬에 참여했다.

8명이 들었지만 어쩌면 이리도 가벼울까?

 

미리 파 놓은 석관아래 맨 몸을 천천히 뉘었다.

삼배로 감싼 퍽이나 작아 보이는 체구.

겨우 몇평에 묻히실걸 그리도 힘들게 일만 하셨을까?

당신의 작은 몸을 땅에 묻히곤 우린 한참을 기다렸다.

유가족의 곡성이 터질걸 예상했으나....

고요하기만 하다.

힐끗 쳐다봐도 아들이건 딸이건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고사하고

측은하게 쳐다보는 자는 없었다.

"야, 너희들 이 순간은 모두들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거 아니냐?

이게 무슨 짓이야? 울음 소리가 나와야 하는건데...?"

"이미 너무도 울어 눈물이 이미 말라버렸어요"

말 대답하는 금옥인가 하는 조카년.

한대 때려주고 싶도록 미웠다.

흙을 덮으면 영영 이별인데 그 순간에도 우는 소리가 나오지 않다니?

기가 막혔다.

7-8개월 동안 병 수발에 질려 버렸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의 순간인데도 눈물 흘리는 자식하나 볼수 없으니...

이게 바로 현실인가?

아들 셋, 딸 둘을 둔 다복한 형님이지만, 이 순간은 그게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란 이렇게도 허무하고 냉랭한가?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냉정하신 아버지.

조부님이 마지막 땅에 묻히실때 아버진 눈물을 흘리셨었다.

그때 봤었다.

"아, 아무리 냉정한 사람도 그 순간은 울음이 나오는가 보다 아버지도 가슴은 퍽이나 따스한 분이셨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이 조카들은 아니다.

 

묘지를 반 정도 작업을 하는 중에 작업인부중에 반장인듯한 사람이 관계자들은 돈을 걸란다.

인부들 술값을 달란 애기지

상윤형님과 성북동 매형과 난 성금을 별도로 냈다.

하나의 전해오는 미풍과 같은것.

 

남산부락은 이렇게도 단합이 잘되고 있나보다.

동네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가면 너도 나도 나와 도움을 준단다.

점심은 마을회관에서 먹었다.

이 음식도 마을 사람들이 자진하여 작만했단다.

이런게 바로 시골사람들의 정이고 순수다.

 

고향을 가면 늘 형님이 묻힌묘지앞을 지나야 한다.

늘당신이 살다시피 한 그 과수원 한귀퉁이.

외롭진 않을거 같다.

늘 그곳에 사셨으니..............

 

82세의 연륜.

한해를 얼마앞두고 가시고 말았다.

이 정도의 삶이 아쉽다고 하기 전에 너무도 힘들게 사시다가 가셔서 불쌍한 생각이 든다.

평생을 한번도 고향을 등져보지 않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사시다가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가신 당신.

지금도 그곳과수원에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줄것만 같다.

"아, 형님 이젠 고통없이 편안히 그곳에서 쉬세요 부디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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