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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3월 11일

3월 11 일은 생애서 잊을수 없는 바로 그 날이라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서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는 한다.

그 날도,

초 봄의 쌀쌀한 새벽 바람이 찬 새벽 4시 반경 영등포 역에 내렸다.

그 누구도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는 타향인 영등포 역.

개나리 봇짐을 둘러매고 경제와 둘이서 내린 영등포역.

인천행 버스에 올라탄 우린 미지의 셰계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로 신앙촌으로

향했다.

 

멀리 오만제단의 휘황찬 불빛과 찬송가 소리가 맘마져 들뜨게 하기에 좋았지.

"그래 여기서 내 꿈을 펼쳐보자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갈곳이 없지"

순진도 했다.

종교인들만 모여사는 이곳에서 무슨 꿈을 펼친다고 그런꿈을 꾼건지....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현실을 목격한 경제는 담날에 가겠단다.

"임마 꿈을 안고 여기까지 왔음 뭔가 해 볼려고는 해야지 그럼 뭐라고 애기할거냐? 너 그럼 남자가 아냐"

하햫하겠단 경제를 달래봤지만 막무가내로 가겠단다.

이머할머니가 애기한 그런 곳이 아닌거지.

10평정도나 되려나?

그 비좁은 방에 준자와 진옥이 이모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으니 모든게 비좁고 불편했지만 참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신앙촌을 마다하고 귀향한다면 아버지 앞에 뭐라고 변명을 할수가 없다.

"남자는 고향을 떠나며는 금의환향을 해야 한다"

머리가 무거웠다.

아니 변명이 용서가 안되었지.

 

학교와 집만 왕래하다가 이런 타향에서 밥벌이하고, 돈을 벌려고 했으니 착각도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지.

신앙촌은 외부에서 자신의 재산을 헌납해야만 대접을 받는 곳이라서 돈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곳이 바로 이곳인데 어디서 돈을 번담?

자신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번듯한 집인 최고급인 A동을 주고 돈이 없으면 다닥 다닥한 비좁은 아파트를 줘 살개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장 불공평한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한창 신앙촌 제품이 인기끈 신앙촌 비닐 시장 바구니.

비닐로 짠 시장바구니는 선풍적인 인기제품였다.

<ZION>마끄를 붙여 팔면 불티나게 팔렸단다.

그 주변에선 짝퉁 신앙촌 제품을 만들어 돈을 벌곤했다

준자 신랑 두기네도 그런걸로 돈을 벌었다 한다.

 

2년간 버텼다.

자립하고 단체생활중에서 익힌 것들이 후에 군생활에 도움이 되었고 견딜수 있는 시간이 되었지만 그 2년간의 세월은 허송세월였는지 아직도 판가름 나질 않는다.

 

범박리 비닐 공장에 다닐때....

눈이 커다란 영숙<강영숙>이와의 짧은 연애.

그녀앞에만 서면 왜 그리도 가슴이 쿵쿵거렸을까?

<널 좋아한다>는 말은 해 보지도 못하고 무료한 애기만 나눴으니 얼마나

바보로 알았을까?

 

수십년이 흐른 지금.

신앙촌은 이젠 어엿한 아파트 촌으로 변해버렷지만....

눈을 감으면, 아련하게 그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범박리 고개를 넘으면 바로 왼편의 <가이드 오피스>

한번 가보고 싶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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