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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곳에서 하지 말라는 딸의 말을 무시할수없어 못했어요
다른 이들 한 모습이 괜찮아 보이셨다면 잘 했다 생각되
물론 사생활이라 공개하긴 좀 주저되는건 있지요.허나,일
이 곳 알게 된지 얼마 안되어 아직 공개는 못하고 있습
네 나인 속일수 없나봅니다각 기능들이 하나둘 고장나고
공감이 됩니다. 저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곳 저 곳
생존시는 그런걸 몰랐는데 막상 영영 이별하니 그리움 뿐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저 역
그런 이유로 공개일기로 작성하시는거잖아요.볼 수 있는
가시기전에 한번 만이라도 손이라도 잡고 애기라도 해야죠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탑배우 김 지미.
1940년생으로 84세를 일기로 저 하늘의 별로 갔다.4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여배우로써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것으로 세간의 화재를 몰고 다녔던 최고의미녀.
우연한 기회에 <김 기영감독>에 의해 픽업된 18살의 소녀.
<황혼열차>가 데뷔작품이라고 한다,
18살의 풋풋한 소녀가 어떻게 영화에 데뷔했을까?
보고 싶어지는 영화.
-어떻게 저렇게 이쁠수가 있을까?
첫눈에 감탄했다고 하였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타고난 김 지미.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란 별칭을 얻을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것이 틀린말이 아니란걸 우리 모두가 공감했을거라 본다.
이쁜 꽃은 그냥 놔두지 않는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꽃다운 20살의 그녈 홍 성기 감독이 12살이나 많았지만 결혼했다.
<손오공>촬영차 홍콩을 갔을때 최무룡과 사랑을 했단다.
이미 최 무룡은 강 효실이란 아내가 있었고 <최 민수>를 낳은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김 지미와의 사랑은 끊을수 없는 상태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당시의 위자료400만원은 엄청난 액수였지만 김지미가 자신의 돈을 주게 되었단 후문.
사랑앞에 그런 돈이 뭐가 아까우랴.
당시 400만원이면 현재론 얼마쯤이나 되는 돈일까 궁금하다.
한때는 전처아들 최 민수를 친 아들처럼 돌봐줘 한번도 최민수는 김 지미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친 어머니 처럼 대했다고 하는건 김 지미의 인간성이 좋은 탓였겠지.
최무룡의 연이은 제작실패로 결국은 최 무룡의 제의로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지금도 회자되는 그 명언.
그 후 11살 연하의 톱 가수 나 훈아와의 6년동안의 부부생활.
그게 1969년도라 나 훈아로썬 한창 인기가수로 이름을 날릴때의 일인데...
탑 배우와 탑 가수의 결합?
막을 내리곤 다시 4번째 남편 이 종구란 의사와 결합하지만..
이혼으로 끝난다.
-인간적이고,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
최무룡과의 결혼생활이 젤로 좋았다고 회고했단다.
최무룡이 별세시엔 장레위원장으로써의 면모도 보였던 통큰 여배우.
내가 봐도 그렇게 뵌다 당시엔 최무룡 처럼 멋진 배우가 없어 보였으니.
-한 많은 미아리 고개,길 소뜸. 지미는 슬프지 않다.등등 700여편이라고 한다.
최고 아닐까?
내가 다녔던 중학교 시절의 <나주 극장>과 <중앙극장>은 김지미 최무룡 주연의
영화간판이
늘 걸려있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
독특한 매력의 미남배우 최 무룡과 최고의 미녀 김 지미의 조합.
1960년 초반은 거의 두 사람의 독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너무도 좋아했던 최무룡과 김지미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배우.
이젠 한 시대의 전설로 되었지만,영화가 절대적인 시민의 볼거리였던 때라 그 영향은
대단했다.
-너 오늘 저녁 영화구경 시켜줄께.
하시곤 나주극장엘 델고 다녔던 상윤형님.
잊을수 없는 추억을 주신 형님도 이젠 저 세상 분
불꽃처럼 살다간 배우 김 지미가 벌써 떠나시다니..
항상 젊음을 보여줘 오랫동안 우리들 곁에 머물줄 알았는데..
잡을수 없는 세월의 무심함이여..
김지미 같은 미인이 또 나올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거 같다.
하늘의 별로 영원한 평안을 누리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