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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또 다시도전을 합니다 이게 인생 이죠 : 18 日目

개교 100주년

<노안초교 10주년 기념>

고향 친구가 올해로 초등100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행사를 한다는 내용을 보냈다.

그렇다면 1924년 개교했단 애긴데...

그 당시는, 일제가 우리의 강토를 유린하곤 맘대로 철권통치를 휘둘렸던 시기.

교장도, 선생도 모두가 일제의 선생였을까?

한글 아닌 일본어를 가르쳤을거란 상상 어렵지 않다.

헌데, 그 학교는 바로 아버지 동네 눈앞인데, 왜 아버진 이 학교를 다니시지 않았었나?

왜 생전에 그 물음을 던지지 못했을까?

무슨 이유로 초딩학교를 다니시지 않았을까?

 

조부님은, 그 당시엔 한문학에 능통해서 한글은 배울필요가 없다고 해서 자식들을

초등학교 보내시지 않았을까?

<노안 국민학교>가 엄연히 지척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막내라 그래도 학교를 보냈어야 했는데...

당신은,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지만, 아들들은 모두가 문맹자로 성장시켰다.

8남매가 되어도 그 나마 아버지만 한문을 배워  유식한편이었다.

자식들은 학교를 보내는 대신 일을 시켜 농토를 넓혀야 한다는 지론였나?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한 아버진 현실타개를 위해 일본행 하셨었나?

<오사카의 7년>간의 삶.

평생 지병인 해숫병만 얻어 오신 아버진 그 병을 완치도 못하시고 가셨다.

 

우리들 시절의 그 학교는 일제의 판잣집 건물로 비가 오면 곳곳에 물이새고 좁아서

학생수가  넘쳐 오전, 후반으로 등교를 해야만 했다.

학교뒷산에 있는 잔디가 우리들 교실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죽....

아람드리  프라터너스가 어찌나 큰지 우리들 동네서도 그 나무 꼭대기가 보였었다.

추억이 깃든 초딩학교 시절.

-춤을 너무도 잘 추신 홍 승룡 선생님.

-자신이 써야 할 글씨를 나보고 쓰라하곤 책을 보시던 오수섭 선생님.

-쉬는 날 불러 고기를 잡자던 이 종연 선생님.

-내 진로를 위해 신경써 주시던 김 동선 선생님.

눈앞에 아롱거린다.

 

동창회를 하니까 담주엔 아마도 100주년 행사에 대한 토론이 있을거 같은데...

거부급 <창> 이 참석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돈의 기부액수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성의를 갖고 대하느냐

진지한 토론이 필요할거 같다.

다른 기수들은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모른척하면 무슨 동문인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바른소릴 해야 한다.

<기념비>엔 우리동창들 이름이 몇몇은 올라야 체면이 서는거니까..

움직이게 해주어야 움직인다면...................?

<돈>과 관련된 문제니까 쉬운일은 아니다.

잡음은 나게 되어있다.

그건 어디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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