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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그때는 힘든때...

1972년 1월.딱 제대하곤 1 년 지난 당시의 일기를 봤다.군대선 잘 나가던 시절이라 막연히 앞날이 밝을거란 기대.아버지의 주선으로 면 사무소 잠업지도원이란 임시직 직원.당숙의 배경으로 43000원을 거마비로 드리고 얻은 취직자리.형이 타던 번쩍이는 자전거 몰고 다님서 일을 했던 취업자리.10월에 들어갔다가 12 월에 짤렸으니 3 달 근무하느라 그 돈을 들였던가?과연 3 달간에 43000원이나 받았을까?
당시의 4 만 3천원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43만원 정도?당시론 시골살림으론 큰 돈였다.자전거 펑크 때우는데 200원 였으니까..



부면장이란(6 급 주사)지만, 그래도 면장바로 아래의 고위직(?)으로 보곤 대단한배경으로 알고서 다음해 당연히 재 임용될줄 알았는데....8명중 2 명은 탈락.또 돈을 줘야 하는데 그걸 몰랐다.10월달에 줬던 돈의 힘으로 당연히 재 임용될거란 믿음바보였지.현실이 얼마나 비정하고, 매정한지...탈락의 전달받고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네 어귀에서 차마 탈락이란 말을 어떻게 애기하고, 신혼생활에 빠져든 형님에게도 전달해야 하는이 비보.울었던 기억이 난다.얼마나 안타깝고 얼마나 앞날이 어둠으로 덮힐거란 불안감.




1년간 채용하곤 다음해 재임용은 거의 모든 행정절차의 수순인데...인원감축으로 희생양된거 뿐인데......젤로 나이든 나 영근씨와 신출띠기 내가 잘린건 순린데.....


그래도 지난해 봤던 교정직시험의 결과.그런 기대가 있었기에 힘든 현실을 견디며 기다렸는데...<불합격>이란 통보.이유가 없다는 통보.것도 지금껏 인연이 되어 좋은 분으로 모시는 연호형님의 정보.-왜?불합격일까?어떤 문제로...점수가 낮아서?





다시금 모든것을 접고 다시 공무원 시험공부에 매진하려 했지만....나만의 빈방이 없다.신혼인 형님부부에게 빈방을 내주니 부모님과 한방에서 기거했으니 
어디서 공부를 할까?<광복>이를 꼬셨다.-같이 공부해서 우리 공무원되자 빽 없는자는 이길 뿐이다.광복이의 빈방을 함께 공부히는 공부방으로 이용키 위한 고육책.
둘이서 공부하면서 잠도 같이 자는 공간.좋았지만, 광복인 공부엔 게으름을 피우더니 포기난,팠지.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한 길은 이 길인 것을...


다시 잠업지도원으로 들어갔고, 공부는 지속되었다.6개월 근무하다가 그해 9월에 연호형님의 배려로 순천으로 발령나서공직의 첫발을 당당히 디딜수 있었다.
























시골의 면사무소 임시직 마져도 돈과 배경이 없으면 안되던 그 시절.좌절과 앞날의 불안함에 늘 마음이 불안정했던  그 해 1972년.시련의 계절을 견딘 것이 지금 읽어도 눈시울이 뜨겁다.ㅡ 그 힘든 시기에 얼마나 내가 추운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듯한고독과 추움.인간은 때론 시련이 더 단련을 해 주는것도 같다.그냥 면사무소 그 직으로 달렸다면 지금 쯤 면장으로 정년퇴직하곤 시골에 묻혀 살고 있을거나?부근의 후배고향 여자와 결혼해서?그랬었다며는 그래도 부모님께 돌아가실때 까지 효도는 했을거 같다.같은 동네 살았을거니까..


-왜 40년전의 일들이 기억에 이렇게도 선명하게 각인될까?내 인생에 힘든 시기였고, 가장 아픔을 느껴 나를 단련시킨 시기여서 그런가 보다.이종사촌 동생 광복이는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전화조차 없다,어떤 죄를 지은것도 없는데........몹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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