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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오랜인연

어젠,

목동 시골식당에서 보신탕을 먹었다.

연호형님과의 자리.

매년 이런 명절이 돌아오면 꼭 만나서 대접하고 촌지도 건넨다.

연호 형님과의 인연은 1972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딱 45 년전.

교정직에서의 최종합격이 불합격 되어 의문이 들었었지.

그걸 알려준게 바로 연호형님였고, 대처방안도 알려줘 공직으로 들어오게

만드신분이라 그 고마움을 잊지못해 매년 잊지않고 이런자릴 만든다.

늘 댁으로 들러 선물보따리를 전해드리곤 햇지만....

편히 만나서 식사하곤 성심담긴 봉투를 드리곤 한다.

-매년 잊지않고 챙겨줘 고맙네.

-자주 자주 모시지 못해 죄송해요 행님, 자주 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데요.

-그럼 늘 바쁜데....


1974 년 5월.

갑작스런 서울로의 이동발령을 받곤 성급히 올라온 그날.

만나뵙곤, 거처까지 부탁드려 형님댁에서 당분간 기거를 했으니

나도 참 조금은 얼굴이 두꺼운 것인가 보다.

사촌 형님이나 누나도 살고 있었지만,연호형님께 부탁이 더 편했다.

금화시민아파트 102 동 504 호.

11 평의 방 두칸을 빌려살았으니 얼마나 힘든시절인가?

그런 부탁조차도 싫은 기색없이 선뜻 방을 빌려준 고마움.

-나도 그런 지경이 온다면 후배에게 할수 있었을까?


그때의 그 온화한 모습과 다정하신 것은 변함이 없다.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망각한다면 그런자는 짐승과 같은 거지.


공직의 길을 그대로 걸으셨다면 지금보다는 더 좋았을것을...

늘 아쉽게 생각한다.

잘 나가시던 공직의 길을 접고 신월동의 성당소속의 s.o.s 마을원장.

그건 명예에 도움은 줬을지 몰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보탬이 안되었다.

그리고 구 의원 2 번.

그것 또한 당신의 미래에 도움은 되질 못햇지.

빚만 지고 만 그 길.

그래서 지금도 보기에 조금 안되어 보일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다.

27 평 연립주택 한채가 전 재산.

아들들이 조금의 도움은 주는지 몰라도 별로인거 같아 보인다.


비록 작은평수의 아파트와 안정된 직장과 맛갈스럽게 음식을 잘 만드시는 형수와

3 남의 아버지인 형님.

뭐 부러울게 없어보였던 그런 분이었는데........

한 우물을 팠더라면 지금은 누구보다도 안정된 노후를 보낼수 있었을 텐데...

조금은 안되어 보인다.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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