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내일기장으로 옮겨 도전한다 :
52 일째
미당에 대한 슬픔( 퍼온글)
요즈음 한 신문사가 `미당문학상'을 제정함으로써, 그동안 진행되어 온 논쟁을 더욱 가파르게 밀고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 신문사는 `미당이 우리 현대시에 끼친 공이 그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게 과연 그런가? 연일 기승 부리는 불볕더위를 견디느라, 심신이 파김치가 되어 있는 터에, 막상 이 까다로운 글을 쓰자니 기분이 썩 내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글의 표적인 미당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미운 일부, 우리 내부의 해묵은 상처나 다름없고,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아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이 칼럼의 지면에 당분간 붙잡혀 있는 처지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하여 오불관언 입을 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병든 체질을 개선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잡으려면 그 상처를 은폐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드러내 치료에 호소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지금 나는 무더위에 연상 비질비질 땀을 흘리고 있는 중인데, 문득 내 몸의 8할이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는 미당의 유명한 시 구절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적 수사일 뿐, 실제로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식민지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을사조약 이후 40년이란 일제 강점의 긴 세월을 겪어야 했던 식민지 문인들의 왜곡된 내면 풍경을 우리는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가혹한 암흑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문인들이 친일의 흠집을 입게 되었는데, 그 부끄러운 흠결들을 함께 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한국문학사의 슬픔이고, 미당을 바라보는 우리의 슬픔인 것이다. 친일의 정도를 가리지 않는 일괄 단죄를 주장하는 과격한 논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옳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문학 자산에 메울 수 없는 큰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치적 과오는 비판하되 작품은 인정해 주자는 것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미당의 정치적 과오가 제대로 비판되고 있다면, 왜 그의 시들이 사회교육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 중고교 교과서에 제일 많이 실리고, 사회적 공기인 신문사가 그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제정하는 어불성설이 저질러지겠는가. 더구나, 미당은 친일에 친군사독재까지 겸했으니, 그 과오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일부 수구 언론의 교활한 생리가 한 개인에게 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미당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으니, 지금 출발하는 기차라면 그것이 어디를 향하든지, 무조건 편승하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좋은 게 좋다는 천박한 현실주의자, 일본제국주의든 제5공화국이든 간에, 군사파시즘을 만나는 순간, 총부리와 군홧발의 그 압도적인 힘에 본능적으로 매료되어 자신을 해체시켜 그 권력의 일부가 되어 해방과 자유를 경멸했던, 그러한 인물이 마치 민족 시인인 양 떠받들어지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그의 지지자들 중에는 그가 교활한 현실주의자라기보다는 정치의 생리를 너무 몰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문학은 천재인데 정치는 바보였다고, 마치 그 과오가 그의 천재성의 불가피한 부산물인 양 궁색하게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미당이 우리 현대시에 끼친 공이 그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하다'는 것도 그와 똑같은 궤변이다. 물론 필자도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인정한다. 그래서 미당에 대한 필자의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막막한 슬픔인 것이다. 그러나 천재성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우리의 숙명적 타자이거니와, 친일의 흠집이 있는 사람을 민족 시인인 양 공동체의 공적 영역에서 대서특필한다면 우선 일본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일본 교과서 왜곡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 교과서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요컨대, 미당의 시를 사적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향유하되, 그것을 공적 영역, 특히 공동체의 대의와 관계되는 곳에는 갖다놓지 말자는 것이다. 현기영/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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